김훈 허송세월 리뷰, 시간을 흘려보내도 괜찮다는 문장

《허송세월》이라는 제목이
처음부터 마음에 걸렸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말처럼 들렸는데,
책 속 김훈은 그 시간을 꽤 바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햇볕을 쬐고,
새를 기다리고,
늙어가는 몸과 지나간 사람을 생각합니다.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의 표지. 나무 아래 정자가 있고, 그 안에 사람이 누워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김훈은 산에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일산 호수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는 그 시간을 두고
허송세월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눈앞의 새와 나무를 보고,
몸이 달라지는 순간을 느끼고,
죽음과 생활에 관해 계속 생각합니다.

김훈 《허송세월》의 뒷표지. 손글씨로 쓰인 짧은 글과 가격, ISBN 정보가 보인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이 문장이 책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은 많은 시간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

잠시 멈춰 있는 시간에도
생각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김훈 작가 소개 페이지. 작가의 흑백 사진과 대표작 목록이 적혀 있다.
“김훈, 글을 통해 삶을 사유하는 작가”

김훈의 글에는
늘 밥과 노동, 말과 죽음이 나옵니다.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다가도
다시 사람의 몸과 생활로 돌아옵니다.

책 속 본문 페이지. 전쟁 당시 철모와 통가지를 이용한 똥통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생활은 크구나,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구나.”

박물관에 놓인 철모와 똥바가지를 보고
전쟁터에서 하루를 버틴 사람을 생각하는 장면도 그랬습니다.

역사 속 이름보다
그곳에 있었던 한 사람의 생활을 먼저 바라봅니다.

김훈 《허송세월》의 차례 페이지. "새를 기다리며", "허송세월", "죽음의 가벼움" 등 다양한 글의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김훈 《허송세월》의 차례 중 2부 "글과 밥"이 포함된 페이지. 다양한 글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글과 밥, 그리고 사색의 기록
김훈 《허송세월》의 차례 중 3부 "푸르른 날들"이 포함된 페이지.
젊음과 시간,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부에서는 늙음과 죽음,
호수공원과 새를 이야기합니다.

2부에는 글과 밥,
노동과 언어에 관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3부에서는 지나간 사람과 시대,
아직 끝나지 않은 사회의 아픔을 돌아봅니다.


차례만 보면 주제가 많아 보이지만
책 전체에는 비슷한 시선이 흐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루를 견디는지,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김훈 《허송세월》의 본문 중 일부. 말하기의 어려움과 언어의 역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이 부분도 오래 남았습니다.

요즘은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오래 듣는 모습은 보기 어렵습니다.

김훈은 말이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고
서로를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고 씁니다.

김훈 《허송세월》의 본문 중 일부. 형용사적 세계관과 빈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형용사와 부사

그의 문장이 짧은 이유도
이런 생각과 닿아 있는 듯했습니다.

꾸미는 말을 덜어내고
말하려는 대상 가까이 가려 합니다.

그래서 문장은 담담한데
쉽게 지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책장에 꽂힌 김훈의 여러 저서들. 《허송세월》을 비롯해 《연필로 쓰기》, 《라면을 끓이며》 등이 보인다.
김훈 책장

《라면을 끓이며》와 《연필로 쓰기》를 읽을 때도
김훈은 생활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허송세월》에서는 늙어가는 몸과 죽음이
조금 더 가까워졌습니다.

책을 덮은 뒤 허송세월이라는 말이
전과 다르게 들렸습니다.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쫓기다 보면
가만히 앉아 있는 일에도 괜히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가끔은
햇볕을 쬐고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루가 있어도 괜찮겠습니다.

그 시간도 결국
내가 살아낸 시간으로 남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