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모든 것이 무너진 것만 같은 순간에 오히려 가장 평범한 내일을 상상해보는 용기를 말해줍니다. 9년 만에 발표된 이 신작 소설집은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각 작품들은 사회적 재난과 혼돈을 지나 “종말 이후의 사랑”을 그린다는 공통된 주제를 안고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곧바로 묵직한 물음과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모든 게 끝났다고 느낄 때, 가장 좋은 미래 — 그러니까 이토록 평범한 미래 — 를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지요.

이 물음은 저 같은 독자에게 특히 깊게 다가왔습니다. 삶의 굴곡을 작게나마 몇 번은 맛본 나이, 크고 작은 상실과 후회를 겪은 나이라서일까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때로는 비관에 빠져본 적 있는 제게, 김연수의 이 소설들은 오히려 그 미래를 “기억”하라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듯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저는 자연스레 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가올 날들을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제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과 겹쳐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깨달음과 감동을 이제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표제작을 비롯한 8편의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를 향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는 옴니버스 서사입니다. 김연수 작가는 특유의 서정적 문체와 철학적 성찰을 통해, 시간과 기억, 존재와 사랑, 그리고 상실과 회복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동그란 파문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듯했어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호수에, 소설 속 한 문장 한 문장이 돌멩이처럼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고, 그 진동이 제 내면 깊숙이 전해져 오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김연수 소설이 지닌 서사 구조와 스타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대한 통찰, 사랑과 상실을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면,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30대 독자의 눈으로 공감과 독백을 차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서사 구조와 스타일, 이야기 속에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층층이 쌓인 서사 구조입니다. 김연수는 한 편 한 편마다 독특한 형식과 장치를 활용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스타일이 참 신선하면서도 일관된 주제를 향해 수렴합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는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세계 종말 예언 소동을 배경으로, 두 젊은 대학생이 동반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우연히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 《재와 먼지》를 접하고 충격을 받죠. 소설 속 인물이 시간여행을 통해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에 감화되어, 이 두 청년은 스스로의 현실을 다시 쓰기로 결심합니다. 현실의 주인공들이 또 다른 이야기(소설)를 읽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이 메타적인 구조는, 김연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야기가 우리 삶을 바꾸어내는 경이의 순간”(작품 뒤표지 글에서 언급된 표현)이라는 말처럼, 이야기는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 인물들을 구원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서사는 다른 단편들에서도 반복되는데, 각기 형태를 달리할 뿐 근본적인 맥락은 통합니다. 이를테면 다섯 번째 작품 〈엄마 없는 아이들〉이나 여섯 번째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에서는 일기, 편지, 메모 등의 형식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 독백과 과거 이야기가 현재의 서사와 교차합니다. 일곱 번째 작품 〈사랑의 단상 2014〉는 특히 인상적인데요, 이 작품은 마치 하나의 콜라주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인터넷 게시글이나 문자 메시지 형식의 문장을 삽입하여 극중 인물이 겪은 2014년 겨울의 기억 조각들을 보여줍니다. 마치 실제로 누군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보이는 이 조각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잃어버린 사람을 떠올리며 인터넷에서 찾아 읽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죠. 이런 파편화된 서사는 현대인의 단절되고 고독한 내면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감정적 진실을 드러내게 합니다.

김연수의 문체는 차분하면서도 서정적입니다. 그는 과하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인물들의 심리를 깊이 파고들며, 문득 문득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들을 흘려보냅니다. 덕분에 독자는 이야기 속에 푹 잠겨들어 마치 흐르는 강물을 따라가는 듯한 기분이 됩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는 예상치 못한 논리의 비약이나 환상적 설정이 불쑥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어떤 작품에서는 역사적 인물 정난주의 전설이 현재의 주인공 곁에서 환영(幻影)처럼 되살아나고(〈난주의 바다 앞에서〉), 또 다른 작품에서는 2100년 미래의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등장하기도 합니다(〈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는 김연수 소설만의 독특한 색채로, 처음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서정적 필치 덕분에 그 비현실의 조각들도 마치 꿈결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몽환적인 동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에세이를 동시에 읽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현실과 상상이 포개지는 김연수의 세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되고, 그 이야기들이 다시 삶을 변화시키는 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과 비현실, 시간과 감정의 경계에 대한 통찰
김연수의 이 소설집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면서, 시간과 감정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각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시간을 다르게 정의하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 책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관이 제시됩니다. 작가는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려 시간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풀어놓는데요, 그 중에서도 저는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 등장하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인물이 이런 취지의 말을 합니다. “인간은 육체로 80년을 살지만, 정신으로는 과거로 80년, 미래로 80년을 더 살아간다.” 무슨 뜻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몸으로는 자신의 일생밖에 살 수 없지만 마음과 기억은 태어나기 전의 옛날 이야기들까지 껴안고 살아가고, 또 동시에 죽은 뒤 먼 미래까지도 상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예컨대 제가 이 책에서 1999년의 이야기를 읽으면 제 어린 시절 그 해의 기억이 떠오르고, 2100년의 편지를 읽으면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그려보게 되지요. 이렇듯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중요한 능력이며, 작가는 그 능력을 통해 우리가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특히 첫 번째 작품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상상은 이 소설집의 핵심 메시지를 잘 담고 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물한 살의 두 청년은 “모든 게 끝났다”고 느낀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지만, 막상 SF 소설 속 시간여행 이야기를 접하자 현재를 바꾸기 위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시간여행이란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새롭게 ‘기억’해보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떠올린다”고 서술자가 고백하는 대목이 있는데요, 여기에는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1999년에 “일어난 일”은 결국 세계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현실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은 바로 예언된 종말 그 자체일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최악의 절망 (세상이 끝나는 일)을 겪지 않고 살아냈다는 사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새로운 내일을 맞이했다는 기억이야말로 현재의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소설 속 인물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 우리 독자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은 느낌이었습니다. “봐라, 1999년에도 모두 끝장날 것 같았지만 인류는 살아남았고, 너의 삶도 이어졌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힘들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평범하고도 소중한 내일을 기억하듯 그려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장치를 통해 한층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결국 상상의 서사는 우리의 실제 감정과 삶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고, 시간의 경계는 그렇게 허물어집니다.

또한 작가는 감정의 시간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슬픔에 매여 현재를 힘들어하기도 하고, 막연한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도 하죠.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잃은 인물(〈난주의 바다 앞에서〉의 주인공)은 상실의 어둠에 갇혀 현실을 살아내기 힘들어하지만, 200년 전 같은 바다를 건넜던 역사 속 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 걸음씩 앞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현재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뜬금없어 보이던 과거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반대로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며 현재의 자신을 위로받습니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순간들에 김연수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삶의 한계 너머로 계속된다”는 희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힘겨워도, 우리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시간은 확장되고 마음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의식 역시 내가 겪은 적 없는 옛 시대의 기억(책과 이야기로 접한)들을 품고 있고, 또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미리 걱정하거나 때로는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의 고민과 고통도 언제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모하고 치유될 여지가 있다는 위안이 찾아왔습니다. 김연수의 소설이 제게 심어준 가장 큰 통찰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상상의 힘을 통해 언젠가 우리 모두가 이해와 공감에 이르는 미래를 꿈꾸는 것 – 그것이 이 책이 전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로 느껴졌습니다.
사랑과 고백, 상실과 기억, 인물들의 내면을 흐르는 감정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큰 축은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제처럼 느껴지는 “종말 이후의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각각의 단편 속 인물들은 저마다 어떤 끝을 지나온 뒤에도 지속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연인 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우정 또는 인류 보편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김연수의 이야기들은 사랑의 밝은 순간보다는 그 이면의 어둠과 슬픔에 더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사랑의 기쁨보다 상실의 아픔을 통해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앞서 언급한 〈사랑의 단상 2014〉를 다시 떠올려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을 직접 말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사람들의 목소리가 에둘러 등장합니다. “너 없는 겨울이 너무 춥다”고 한탄하는 그 문장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립니다. 이 소설은 그런 불가능해진 고백에 얽힌 슬픔을 가만히 끄집어냅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말해두지 못한 사랑이라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실제로 소설 속 한 대목에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p.211)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책을 잠시 덮어야 했습니다. 마치 누군가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그래, 내가 잊고 살 뿐이지, 분명 사랑은 거기 있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나간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김연수는 우리 각자가 가슴 한켠에 묻어둔 “영원한 사랑”의 기억을 조용히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내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해도, 한 번 존재했던 사랑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이지요.
이 메시지는 상실의 경험과 맞닿아 있을 때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여러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다양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수도 있고(〈엄마 없는 아이들〉에서는 제목 그대로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등장하죠), 이별이나 실패를 통한 상징적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김연수는 그 상실의 후유증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예를 들어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에서는 주인공이 평생 잊지 못한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삶이 채워져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변은 변했지만, 문득 떠오르는 그 한 사람의 기억이 주인공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그에게 과거의 사랑은 끝나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감정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우리가 누구나 가지고 있을 추억 속 인물에 대한 감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또한, 김연수의 인물들은 내면의 독백을 통해 사랑과 상실을 곱씹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여도, 속으로는 수없이 말을 건네고 답하지 못한 편지들을 쓰고 있다는 듯이요. 특히 마음을 울렸던 부분은, 상실을 딛고 회복에 이르는 순간들입니다. 이 책에서 회복이란 요란한 극복이나 새로운 사랑의 시작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조용히 기억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는 떠나보낸 딸아이를 가슴에 품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딸과 나누지 못했던 말들을 혼잣말로 꺼내 보기 시작합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말을 수십 번은 삼켰을 그가 드디어 텅 빈 방에서나마 그 한마디를 내뱉는 장면은, 눈물이 솟구치는 한편으로 묘한 따뜻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치 늦었지만 결국 도달한 고백이, 상실의 시간을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듯했거든요.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연신 “사랑해”를 되뇌었습니다. 평소 쑥스럽다는 이유로 자주 표현하지 못했던 말인데, 책을 덮기 전에 꼭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렇듯 사랑과 고백, 상실과 기억을 다루는 김연수의 태도는 한없이 진지하고 다정합니다.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사랑과 이별의 기억까지 소중하게 돌아보게 만드니까요.
서른중반, 우리의 현실과 맞닿은 공감의 순간
저는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깊은 공감과 울림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20대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온 시간이 쌓이고, 잃어본 것도 있고 이루어낸 것도 있는 지금의 나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속 이야기들은 마치 내 일기장의 페이지들을 소설로 옮겨놓은 듯한 친숙함마저 들었습니다.

우선, 시간에 대한 철학은 중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대의 시간은 끝없이 흘러 넘칠 것만 같고 60대의 시간은 점점 속도가 붙는다고들 하지만, 30대 후반의 시간은 그 사이에서 묘한 전환점처럼 느껴집니다. 젊음의 절반을 지나왔고 남은 인생을 그려보게 되는 때이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이 소설집 곳곳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응시하는 시선이 특별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김연수 작가 자신의 시선과도 통하는 부분일 텐데,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 있었지요.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러니까 더 많은 세계를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게 되는 거야.” 이는 한 인물이 예술과 세계를 이야기하며 한 말인데, 30대의 제게는 곧 이렇게 들렸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알고 다양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의 존재도 그만큼 확장된다.” 저는 이제 겨우 세상의 일부분을 이해해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에 더 많은 사랑과 이야기를 내 안에 품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길이겠지요.
또한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 30대를 살면서 저도 여러 형태의 이별을 겪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맞이했을 때의 충격,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졌을 때의 공허함, 친했던 친구와 서서히 멀어지며 느꼈던 씁쓸함…. 젊었을 땐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 압니다. 결국 상처를 낫게 하는 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억의 형태가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이 책 속 인물들도 각자의 속도로 그 과정을 겪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울컥하며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고백 장면에서 저는 제 일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희망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꺼내기 어려워지는 말들이 있는데, 결국에는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구나, 그게 언제가 되었든 통증을 조금은 덜어주는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 부모님 세대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미리 짐작하기에는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사랑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김연수의 소설 속에 흐르는 따뜻하면서도 애잔한 정서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립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들, 친구나 연인에게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결국 마음에 남아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아마 인생의 절반쯤을 통과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평범한 미래”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며 저는 묘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젊을 땐 화려한 미래를 꿈꾸곤 했지만, 이제는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곤 합니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팬데믹과 사회적 격변을 겪으며 일상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았지요. 책에서 말하는 “평범한 미래”란 그저 그런 미래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미래상일 것입니다. 별일 없이 가족과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내일.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기적 같은지, 이 책을 덮고 난 저는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오늘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영화 같은 드라마가 아니라, 내 곁의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의 삶이라는 것도요. 30대의 현실감으로 볼 때, 이것만큼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요?
읽는 내내 저는 가슴 속 작은 불빛 하나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슬픔에 아려오면 불빛이 흔들리다가도, 곧 따스함에 다시 밝아지는 느낌이랄까요. ‘공감’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거겠지요. 김연수의 인물들은 결코 제3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곧 저였고, 제 친구들이었으며, 제 부모님이자 미래의 제 아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흘린 눈물이 내 눈물처럼 느껴졌고, 그들이 잡은 희미한 희망의 끈을 나도 함께 붙잡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평범한 내일을 기다리며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 저는 깊은 숨을 내쉬며 한동안 여운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제게 준 감동은 한 가지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았어요. 그것은 아픔이기도 했고 위로이기도 했으며, 철학적인 깨달음이자 따뜻한 포옹 같기도 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인생의 비극과 희망을 한데 어우르는 묘한 하모니를 들려주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처 입은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지, 그 과정을 아주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냈지요.

읽는 내내 곱씹었던 문장이 있습니다.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 작가는 아마 이 가능성을 굳게 믿는 “이야기 중독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언젠가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고, 그 이야기들이 공유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공감과 연대의 미래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과 기억 속에서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리뷰를 마무리하며, 저는 문득 “평범한 미래를 기억한다”는 역설적인 구절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믿음과 상상의 다른 말일 겁니다. 힘들 때일수록 언젠가 다가올 내일을,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온기가 흐르는 내일을, 마치 이미 겪은 일인 양 생생히 떠올려보는 일. 그것이 현재를 버텨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김연수의 소설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도 조심스레 미래를 “기억”해보려 합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눈부시게 따뜻할 그날들을요. 우리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으며, 상실은 또 다른 사랑의 모습으로 남는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창밖을 보니 어둑어둑 저무는 하늘에 하나둘 불빛이 켜지고 있습니다. 별일 없었던 오늘 하루가 저물어가고, 내일도 아마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압니다. 그 평범한 내일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그리고 그 미래를 향해 우리가 얼마나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하는지를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제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고마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제 삶에 스며들었고, 저는 한층 더 삶을 사랑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평범한 우리의 미래가 실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경이로운 희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도 느끼시길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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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하고 미혹된 중년을 위해 생의 허무를 넘어서는 법 | 사라진 것들 | 이토록 평범한 미래 |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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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 김연수,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중심으로 상실과 회복, 중년의 사유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소개합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들이 필요한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상입니다.
✨ 『이토록 평범한 미래』 출간 기념 실시간 스트리밍✨
이야기 중독자들의 만남
📅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2. 10. 27.
📖 김연수 작가 & 박혜진 평론가와 함께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
💬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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