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리뷰, 느리게 쓰는 문장에 대해 생각한 책

《연필로 쓰기》를 보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완성된 문장보다 고친 흔적이었습니다.

줄을 긋고, 다시 쓰고,
옆에 다른 말을 적어둔 원고.

연필로 쓴다는 건
조금 느리게 말하겠다는 태도처럼 보였습니다.

빨리 쓰고, 빨리 지우고,
빨리 올리는 일에 익숙한 요즘이라서
그 느림이 더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좋은 문장을 쓰는 법보다,
말을 함부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에 가까운 책이었습니다.

김훈 작가의 원고지 위 손글씨 원고. 연필로 작성된 필기와 수정 흔적이 보이며, 페이지 상단에는 형광 포스트잇이 붙어 있음.
지우고 다시 쓴 흔적.

원고지 위에 남은 선들이 먼저 보였습니다.

글자는 적혀 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보인 건
망설임의 흔적이었습니다.

한 번에 나온 문장이 아니라
지우고, 고치고, 다시 붙잡은 문장들.

김훈의 글은
처음부터 단단하게 태어난 문장이라기보다,
오래 붙잡혀 있다가 겨우 나온 문장처럼 느껴졌습니다.

김훈 작가가 연필로 작성한 원고지. 수정 흔적과 강조 표시가 있으며, 페이지 위에 여러 개의 색깔 포스트잇이 붙어 있음.
문장이 되기 전의 망설임

다른 원고 사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완성된 책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과정.

생각이 문장이 되기 전,
문장이 다시 지워지기 전,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들.

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지러운 생각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의 속표지. 연필을 든 작가의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연필로 쓰기.

제목은 단순합니다.

《연필로 쓰기》

처음에는 약간 낭만적인 제목처럼 보였습니다.

연필, 원고지, 지우개 가루.
요즘에는 조금 멀어진 물건들이니까요.

그런데 읽다 보니
연필은 감성적인 소품이 아니라
글을 대하는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쉽게 내보내지 않고,
조금 더 머뭇거리고,
다시 고쳐 쓰는 방식.

연필로 쓴다는 건
느리게 쓰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연필로 쓰기 서두에 실린 김훈의 알림글.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담은 서문.
책이 바라는 것.

알림 페이지도 오래 남았습니다.

작가는 이 책의 출간으로
자기 절망이 해소된다면
그것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적습니다.

책을 낸 사람이면서도
책이 자기 뜻대로 읽히길 바라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 태도가 좋았습니다.

글은 세상에 나오면
더는 온전히 작가의 것이 아닙니다.

읽는 사람의 시간과 상황 속에서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남습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연필로 쓰기의 목차 페이지. ‘연필은 나의 삽이다’, ‘발과 똥’, ‘내 마음의 이순신’ 등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음.
연필은 나의 삽이다.

차례를 보니
김훈의 글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였습니다.

호수공원, 밤파동, 늙기와 죽기,
동거지도, 내 마음의 이순신.

거창한 곳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풍경,
오래된 기억,
몸에 붙어 있는 감각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들이
문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집니다.

연필은 나의 삽이라는 말처럼,
이 책은 땅을 조금씩 파내듯
사물과 사람을 들여다보는 책이었습니다.

연필로 쓰기 2부 목차 페이지.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라는 부제 아래, 떡볶이, 오이지, 태극기, 육군 병장 등의 다양한 소재가 등장함.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2부 제목이 좋았습니다.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글을 쓴다는 건
쓰는 일만큼이나 지우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잘못 썼다는 생각,
아직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
이 말은 너무 앞서갔다는 불안.

그런 것들이 지우개 쪽에 남습니다.

요즘은 삭제가 너무 쉽습니다.

키 하나로 지우고,
다시 쓰고,
없던 일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필로 지운 자리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그 흔적이 오히려
생각이 지나간 자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연필로 쓰기 3부 목차 페이지. ‘연필을 깎아 시가 가루는 쌓인다’라는 부제 아래, 말의 더러움, 공차기의 행복, 냉면, 새들 등의 글이 수록됨.
연필은 닳고 가루는 쌓인다.

3부의 차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의 더러움,
벌어 내 가슴에,
공차기의 행복,
세월호,
고래를 기다리며.

개인의 일상에서 시작한 글이
어느 순간 사회의 기억 쪽으로 번집니다.

김훈의 글은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일들,
잊기 어렵고 말하기 어려운 일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봅니다.

읽다 보면
좋은 문장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어떤 장면 앞에 잠시 서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필로 쓰기 본문 일부.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라는 문장이 강조되어 있음.
보던 것이 겨우 보일 때.

이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젊을 때는 많은 것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 빨리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가까운 것들은 오히려 대충 넘기고,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며 지나갑니다.

김훈의 문장은
더 많이 보게 하는 문장이라기보다
늦게 보게 만드는 문장에 가까웠습니다.

빨리 이해시키는 글이 아니라,
읽는 속도를 늦추는 글.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문장보다 먼저 태도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연필로 쓰기》는
자꾸 멈춰서 읽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연필로 쓴다는 건
그저 손으로 쓴다는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말을 조금 늦게 내보내는 일.
지우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
사람과 사물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는 일.

이 책을 읽고
나도 연필을 잡고 싶어졌다기보다,
내가 너무 빨리 쓰고
너무 빨리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말은 쉽게 나가지만
다시 주워 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연필로 쓴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김훈의 《연필로 쓰기》는
좋은 문장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말이 되기 전의 망설임을 오래 바라보게 한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