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점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처음 마주쳤을 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베스트셀러 코너에 꾸준히 놓여 있어 자연스레 눈길을 끌었지만, 나는 평소 여러 명언이나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짜깁기식’ 구성의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흔히 말하는 “나이 마케팅”이랄까, 마흔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제목도 약간은 상투적이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다만 표지에 적힌 부제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이라는 문구는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도 마음의 위기가 있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그 부제가 주는 묘한 위안과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사실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에는 오래전부터 익숙했다. 그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어, 그 철학이 담긴 책이라면 너무 어둡거나 어려운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하지만 막상 첫 장을 펼쳐 읽어나가면서, 내 예상과는 다른 느낌에 사로잡혔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몇 쪽을 읽었을 뿐인데도, 문장마다 삶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어 가볍게만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 이 부분은 잊지 말고 기억하고 싶다”며 펜을 들어 밑줄 긋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철학 서적이라고는 하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쉽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풀어져 있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도 없었다. 덕분에 책 속으로 금세 빨려 들어갔다.
이 글에서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내가 느낀 점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책과의 첫 만남에서 느꼈던 인상, 읽는 동안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구절들, 그로 인해 떠올랐던 삶에 대한 고민과 철학적인 사유들을 차례로 풀어볼 생각이다. 쇼펜하우어의 다소 어둡게 비치는 철학이 어떻게 지금 우리의 삶에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책이 내게 어떤 개인적인 울림을 주었는지를 자연스러운 말투로 전해보고자 한다.
책과의 첫 만남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이 책을 펼쳤던 순간이 생생하다. 창밖으로 햇살이 평화롭게 쏟아지고 있었고, 카페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방금 받은 따뜻한 라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고소한 커피 향과 함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마주한 한 문장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이 구절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문장이 날 반겨올 줄은 몰랐다. 당황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신선했다. 평소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법한 비관적인 문장인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첫 장에서 만난 인상적인 구절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라는 냉정한 문장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놀라움과 묘한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삶이 괴롭다는 이 선언은 언뜻 보면 부정적으로만 들리지만, 오히려 나는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내 등 뒤에 쌓아 두었던 삶의 무게를 조용히 인정해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힘들 만하니까 힘든 거야”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는 것만 같달까. 처음에는 이 책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고 했는데,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내 태도가 달라졌다. 적어도 이 책은 내 삶의 고단함을 솔직하게 마주하게 해줄 거란 기대가 생겼고, 나는 어느새 진지한 마음으로 다음 내용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사실 첫 장의 제목부터가 도발적이었다. “마흔, 왜 인생이 괴로운가”라는 챕터 제목은 마치 내게 “왜 삶이 이렇게 힘든지 한 번 들여다보자”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오면서도 가끔 ‘왜 이렇게 사는 게 버거울까’ 자문하던 내 자신과 책이 대화를 시작한 느낌이었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을 빌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중년의 허탈감과 고단함을 하나씩 짚어줄 것만 같았다. 첫 만남에서 받은 이 인상 덕분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며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인상 깊은 구절들과 사유
첫 장의 임팩트 이후로 책을 읽는 내내 많은 문장들이 마음에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은 어렵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속 시원할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예컨대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족은 잠시이고 곧 새로운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서 손에 넣더라도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후엔 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들고, 채우지 못한 갈증이 우리를 괴롭힌다. 예컨대 새로 나온 스마트폰을 손에 넣기 전에는 그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게 만족스러울 것 같다가도, 막상 사고 나면 얼마 못 가 또 눈길이 딴 데로 향하는 식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끝이 없어, 하나를 이루면 다음 것을 원하고, 그것을 이루면 또 그 다음을 바라는 식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끝없는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불안과 허무로 몰아넣는데, 이 대목에서 문득 공감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다.
쇼펜하우어는 이 끝없는 욕망 때문에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진자처럼 흔들린다고 보았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고통스럽고, 원하던 것을 이루면 또 금세 권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너무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우리가 힘들 때는 그것 때문에 괴롭고, 막상 모든 문제가 사라지면 또 심심하고 허전해하는 게 인간이니 말이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는 뜨악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행복만 가득할 것 같은 천국에조차 지루함이 가득할 거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일리가 있었다. 결국 인간은 완전한 행복이나 완전한 평온 같은 상태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늘 새로운 자극이나 만족을 찾아 헤맨다는 뜻일 테다.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구절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괴롭고, 얻으면 이내 무료해진다는 통찰은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그동안의 내 시간을 떠올렸다. 힘들게 목표를 이뤘을 때 처음엔 기쁨에 들떴지만, 머지않아 또 다른 공허함이 밀려왔던 순간들이 있었다. 반대로 바쁘게 달릴 때는 “좀 쉬고 싶다” 투덜대다가도, 막상 한가해지면 금세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던 기억들도 스쳤다. 고통과 권태라는 두 축 사이에서 흔들리는 진자처럼, 내 마음도 끊임없이 움직여왔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이 냉철한 통찰은 내가 느끼던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또 다른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고독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려 하지만, 정작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이 책에서 만난 구절 중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는 지적이 특히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비롯되었던가. 사람들은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 안심하고, 혼자 남겨지면 불안해한다.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두려워 일부러 사람들을 찾고, 휴대폰 알림이 뜨지 않으면 왠지 초조해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요즘은 SNS로 끊임없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스스로와 단둘이 마주하는 법은 점점 잊혀져 간다. 나 자신도 문득 외로운 주말이 찾아오면 괜히 연락처를 뒤적이며 누군가를 찾아 나서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긴다”는 구절은 현대인의 문제를 꿰뚫는 말처럼 느껴졌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 나날이 때로는 더 큰 불행을 자초했음을 떠올리며 뜨겁게 공감했다. 이 문장을 읽고서 나는 잠시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정말 혼자 보내는 시간을 불안해하며 채우기 급급했던 적이 많았다. 쉴 틈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온라인 공간을 기웃거린다고 해서 진정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온전한 혼자의 시간을 견딜 줄 아는 것이 행복의 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겼던 크고 작은 실수들과 상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이 수백 년 전 것이건만, 지금 나의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모습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또 한 구절은 사랑에 대한 통찰이었다.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라는 문장을 읽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사랑만큼 한 사람을 행복의 절정으로 올려놓기도 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세상이 다 내 것 같다가도, 사랑이 깨졌을 때는 모든 걸 잃은 듯 절망에 빠진다. 쇼펜하우어의 이 냉소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에 크게 공감하며, 나 역시 지난날의 사랑과 이별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평범한 감정과 관계들까지 되돌아보게 만들며, 철학적 사유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쓴웃음을 짓게 만든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구입하는 것과 그 책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혼동한다.”라는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사두기만 하고 펼치지 않은 책들이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의 독자들도 지금 우리와 비슷하게 행동했다니 왠지 우스우면서도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때로는 웃음 짓게 하는 현실적인 지적들 덕분에, 책의 내용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오늘은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문득 멈춰서서 내 앞에 놓인 커피 향과 그 순간의 햇살을 한껏 음미하게 되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평범한 광경조차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당연하게만 흘려보냈던 지금 이 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는 말에서는 행복을 새로운 각도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즐겁고 짜릿한 순간을 행복이라고 여기지만, 어쩌면 평온함, 즉 큰 불행이나 아픔이 없는 상태 자체가 가장 큰 행복일지 모른다는 역설 말이다. 우리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하루를 때로 ‘심심했다’고 여기지만, 돌이켜 보면 큰 문제없이 지나간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평화였는지 깨닫곤 한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을 따라가다 보니, 행복을 향한 시각이 조금씩 교정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통해 나는 행복과 삶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개인적 울림
이 책을 통해 접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삶 깊은 곳에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마흔 근처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몇몇 문장은 잔잔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내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했달까. 사회에서 인정받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달려왔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함, 안정적인 일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분명 청춘의 치열함을 지나 어느 정도 삶이 자리를 잡는 시기다.(물론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 앞으로 남은 세월에 대한 막막함,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가 뒤섞여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점점 늘어가는 책임감도 마음 한켠의 불안을 키웠다. 이런 내게 ‘나무도 튼튼하게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고, 인간도 건강하려면 운동이 필요하다’는 구절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몸과 마음 모두 적당한 어려움과 마주해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정작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적은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나는 무엇을 쫓아 살아왔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자문이 떠올랐다. 그러던 차에 책 속의 문장들이 마치 내 마음을 대신 설명해 주는 듯해 가슴에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 “삶의 무게 중심을 타인에게서 자신으로 옮기라”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내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돌이켜 보면 나는 너무 오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작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놓칠 때가 많았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직업,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를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래서 얻은 행복은 순간적이고 금세 휘발되곤 했다. 반면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원해서 선택했던 일들은 비록 힘들었어도 오래도록 내 안에 의미로 남아 있었다. 이제는 남의 기준에 맞춘 가짜 행복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에서 느끼는 진짜 행복을 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진짜 행복을 좇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 한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행복을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이라면 그 의미가 다를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동안 고통을 피하려고만 했지, 어떤 고통은 오히려 가치 있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자신만의 목적을 위한 고통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한동안 책을 덮고 지난날의 나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인정받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안아 밤늦게까지 야근을 일쑤로 하던 나날들, 마음의 외로움을 감추려 일부러 과도하게 일정으로 채워넣으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렇게 애써 얻은 것들은 잠시 반짝였지만 금세 의미를 잃었고, 대신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피로만 남겼었다. 결국 그때의 고통은 나를 한 걸음도 성장시키지 못한 채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반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일로 힘들었던 시간들은 지나고 나니 값진 추억과 자부심으로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그런 남을 위한 고통 대신, 내가 진정 원하고 의미 있다고 믿는 것을 위해 흘리는 기쁜 땀과 눈물을 택하고 싶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더 힘든 길처럼 보여도, 내 영혼을 지치게 하는 무의미한 괴로움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또 한 가지 마음에 남은 메시지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쇼펜하우어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의 자존감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존심이 무너진 자리에 자긍심이 피어난다”는 식의 문장이 대표적이었다. 남들의 칭찬이나 체면 때문에 세워 둔 허세의 자존심이 무너져내릴 때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진정한 긍지와 자부심이 피어날 수 있다는 뜻일 터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뜨겁게 공감했다. 사실 내 안에도 남들에게 보이는 자존심과 진짜 내적 자존감 사이의 괴리가 있었다.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속으로는 쉽게 상처받고 흔들리던 내 모습을 돌아보니 더욱 그랬다. 이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마음을 갖고 싶다고 다짐했다.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내게 많은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단순히 철학 지식을 얻었다기보다, 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인생 선배와 깊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삶이란 이런 거야, 하지만 너무 낙담하지는 마” 하고 조언해주는 목소리가 책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때론 어떤 문장에서는 왠지 모르게 위로받는 기분에 울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대목에서는 뜨끔한 충고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그렇게 웃고 울며 책장을 덮을 즈음엔, 처음 이 책을 펼쳤던 카페에서의 나보다 한층 단단해진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철학이 주는 위로
흔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비관적이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사상에서 큰 위로를 얻었다.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만 보라고 등을 떠미는 조언보다, “인생은 원래 괴로운 법”이라고 담담히 말해주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진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현대 사회는 언제나 즐겁고 성공적인 모습만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서 많은 이들이 말 못 할 고통과 우울을 품고 살아간다. 이럴 때 “누구나 힘들다. 삶은 원래 쉽지 않다”는 깨달음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 혼자만 부족하고 나약한 게 아니라는 안도랄까. 오히려 그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은 절망이 아니라 치유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삶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일깨워준다.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의미 있는 고통을 선택하라는 그의 충고는 좌절에 빠진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괴롭다고 회피만 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그 고통의 이유를 바꾸어보라는 발상은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현실의 무게를 인정하면서도 주저앉지 않고 일어설 힘을 얻은 기분이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결국 내게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지만, 내 손안에 있는 것들에 충실할 때 비로소 마음이 자유로워진다는 조언으로 들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비교하고 욕심내지만, 정작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쇼펜하우어의 가르침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욕망과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괴로움이 차츰 옅어질 것이다. 나 역시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 몇 개를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못 이룬 것투성이인 내 삶이라 해도, 내 안에 분명히 내가 이루고 누리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던 건 아닐까. 내게 없는 것보다 내게 있는 것, 남들이 보는 나보다 내가 느끼는 나에게 집중하라는 이 철학적 가르침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위로처럼 여겨졌다.
무엇보다 마음을 덮어주는 것은 쇼펜하우어 철학이 주는 연대감이었다. 고통은 특별한 실패자가 겪는 벌이 아니라, 누구나 짊어지고 가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 말이다. 그의 글을 통해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심지어 쇼펜하우어 자신 역시 젊은 시절 인정받지 못해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스스로를 믿고 버텨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책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30대에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을 때 일부러 당시 최고의 철학자 헤겔의 강의와 같은 시간에 수업을 여는 배짱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하게도 수강생이 단 한 명도 없었고, 텅 빈 강의실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로 한동안 은둔하며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내 가치를 알아줄 것’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고 학문을 이어갔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며, 천재 철학자도 한때는 세상과 불화하고 외로움 속에 버텨냈다는 사실이 묘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그는 나중에야 세상이 알아주었지만, 그 시절에도 스스로 흔들리지 않았기에 나중에 기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이러한 뒷이야기들은 쇼펜하우어라는 인물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게 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간 끝에야 비로소 진가를 인정받은 그의 삶은, 지금 흔들리는 우리에게도 “포기하지 말라”는 조용한 격려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쇼펜하우어는 단순히 세상을 비관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균형 있게 즐기며 살았고, 반려견과의 산책을 즐기며 건강을 관리했다. (참고로 그의 사랑하던 푸들 이름은 ‘아트만’이었는데, 매일같이 그 강아지와 산책하는 모습은 왠지 냉철한 철학자의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즐기며 균형적으로 사는 법을 알았다. 행복과 고통을 알기 시작한 마흔에게, 삶을 현실적으로 보고 싶은 마흔에게, 인생의 무게 중심을 자기 안으로 옮기고자 하는 마흔에게 ‘생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고 인생을 지혜롭게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안내한다. 그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냉혹하기만 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느껴졌다. 일부러 꾸며낸 희망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찾아낸 희망이기에 더욱 믿음직한 위로랄까. 비관 속에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와, 그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용기가 동시에 담겨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진짜 긍정이 아닐까 싶다.
마무리

책을 끝까지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조용한 카타르시스에 휩싸였다. 밑줄로 가득한 페이지들을 다시 훑어보며, 이 책이 내 마음에 남긴 울림을 곱씹어 본다. 인생이 본래 녹록지 않다는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괴로움이 찾아와도 예전처럼 당황하거나 스스로를 탓하기보다는, “또 왔구나” 하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고통의 순간조차도 내가 선택한 의미 있는 과정이라면 기꺼이 버텨낼 용기가 생겼다. 비관주의 철학자에게서 오히려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다니, 책을 읽기 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문득 책을 처음 집어 들었던 카페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단지 가볍게 시간이나 때워보려 했던 내가, 이제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은 바꾸게 되었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물론 사람의 본성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소한 일에 흔들리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우울해질지 모른다. 그래도 이제 내 안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진 듯한 기분이다. 쇼펜하우어라는 냉철한 현인이 들려준 현실적인 조언들은 앞으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마흔이라는 시간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한 번 펼쳐 보시길 권하고 싶다. 철학 서적이라고 해서 너무 어렵게 느껴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인 강용수 님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우리 일상 속 이야기로 풀어내 주기 때문에, 마치 가까운 선배나 멘토의 조언을 듣는 듯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굳이 마흔이 아니라도, 인생의 여정에서 방향을 잃었다 느껴질 때 이 책은 친절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때로는 따끔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건네는 쇼펜하우어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친 마음을 일으켜 세워줄지 모른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고난과 행복을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행자라는 사실을 이 책은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니 이전보다 세상이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졌다.
인생 후반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뜻밖에 만난 쇼펜하우어는,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주는 듯하다. “걱정 마라. 삶은 원래 고달프지만, 그 속에서도 너만의 길을 찾아 나가면 되는 거란다.” 그 목소리는 차갑고 이성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이 서려 있다.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철학이 오히려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나는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미소 지어 본다. 내일의 삶도 분명 완벽하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단단해졌으니까. 그렇게 묵묵히 나만의 진자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카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붉은 노을빛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 아래 펼쳐진 풍경이 이상하게도 쓸쓸하기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고 나니, 마음속에 작은 등불 하나가 환하게 켜져 있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집으로 향한다. 하루를 끝내는 하늘을 배경으로, 내 안에서 무언가 단단해진 채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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