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멈춘 자리

최만리 산문 대표 이미지, 빈 한 칸을 떠올리게 하는 어두운 추상화
비어 있는 한 칸처럼 남은 고독.

최만리

차라리 네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라.
아무 걱정 없이 이 세상을 떠나라.
그리하면 나의 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니.

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내 나라의 성벽 안에서조차 치열하게 나태해지기를.
마치 게으른 묘처럼, 단 한 칸만을 위해 눈빛을 빛내라.

너는 내게 있어 궁전의 한 조각,
고독한 그 한 칸이었다.
나는 왕으로서 그 고독 속에서도 여전히 너를 사랑했으니.

나는 단 한 칸의 움직임만이 허락된 존재였다.
이 좁디좁은 세상 속에서, 묻히지 않고 홀로 고독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너의 존재는 언제나처럼 찬란히 빛났다.
손에 든 관을 바라보며, 비어버린 한 칸의 궁을 생각했다.
그곳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을 결핍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창살처럼 얽힌 나뭇가지들 위에,
네가 차지했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하나, 별, 둘.
너를 기억하는 듯이 눈부시게 떠 있었다.

열십자로 교차하는 나뭇가지 위에
한 칸씩 반짝이며 별이 놓일 때마다, 네가 지고 나타났다.
나뭇가지 두 줄은 언젠가 서로를 만나 하나가 되었지만,
우리는 고독 속에서 서로를 등진 채 선(璇)이 되었다.

그 빈 십자는 내 곁에 남은 마지막 충직한 신하였으며,
동시에 네가 떠난 선택의 흔적이었다.

왕으로서 놓을 줄 아는 자여야 했다.
결국 너의 위에 나를 맡김으로써,
내 욕망의 자리를 확인하며 나는 진정한 무위(無爲)의 왕이 되었다.

왕의 사랑은 결국 행동을 통해 완성된다.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사랑했다.
나의 신하였기에, 성벽의 일부였기에.

백성을 위함이란 과연 귀하고 빛나는 것일까.
그 빛남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음을,
나는 너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였고,
나는 그 생명에 의해 매일 달라졌다.

너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단단하게 나를 지켜주는 존재,
내가 의지했던 검은 심연이었다.

내가 느꼈던 어두운 밤의 섬세함,
그 섬세함이 곧 너와 나였다.
너는 내가 그 어둠 속에서조차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했던 별이었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나는 궁 안에 갇히고 우리는 죽는다.

너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사라진 지금,
내 마음은 겨울비처럼 차가운 속엣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깊이 젖어 속까지 짙은 대리석처럼 냉혹한 마음 위에
네 이름을 한글로 적음으로써,
나는 너를 이 궁에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

비가 내리던 날,
쏟아지는 감정으로 네 이름을 파내었을 때,
그 순간은 나의 평생을 관통했다.

찰나의 기억은 영원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너는 영원히 내 안에 머물렀다.

낯선 판 위에서 너는 항상 독특한 방식으로 나를 설득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환기시키고,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모자란 천재처럼 보였고,
협소한 나는 너의 세계에서 늘 타인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였다.

냉철함과 절제에서 오는 고결함,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과연 왕으로서의 의무일까.
아니면 마음에 끌리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본질일까.

나는 두 나라의 경계에 서 있었다.

네가 없는 이 자리는 한없이 고요했다.
나의 고독은 한(漢)처럼 멈춰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초(楚)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나는 왕으로서 궁에서 살창 밖으로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세상은 잊혔고, 남은 것은 기억과 그 속에서 길어낸 고독뿐이었다.

© Bluebird.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