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책을 읽어도
문장이 잘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읽고는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고,
좋은 말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럴 때는
많이 읽는 것보다
천천히 쓰는 일이 더 맞을 때가 있습니다.
장석주의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은
그런 날 펼치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좋은 문장을 읽고,
손으로 따라 쓰고,
잠깐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표지는 조용합니다.
가운데 놓인 연필 하나가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읽는 책이면서
쓰는 책입니다.
좋은 문장을 많이 아는 것보다
한 문장 앞에 오래 머무는 쪽에
더 가까운 책이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문장이 있고,
그 문장을 따라 쓸 공간이 있습니다.
그 구조가 좋았습니다.
읽고 지나가는 문장이
손을 거치면
조금 더 천천히 들어옵니다.

장석주 시인은
오래 읽고 오래 써온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문장들도
가볍게 골라진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문학, 철학, 인문학 안에서
오래 남을 만한 문장들이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그 문장들 옆에
짧은 글이 붙어 있고,
빈 공간이 이어집니다.
그 빈 공간이
이 책의 매력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이 다 말하지 않고,
내가 손으로 채우게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머리말 제목이 좋았습니다.
나를 물들이는
문장과의 만남.
좋은 문장은
한 번 읽는다고 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따라 쓰면
조금 달라집니다.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문장의 속도가 느려지고,
생각도 같이 느려집니다.
저는 그 시간이 좋았습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
글씨를 또박또박 쓰다 보면
문장보다 먼저
내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필사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오늘의 나를
잠깐 붙잡아두는 일이었습니다.

이 페이지는
문장 자체의 분위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되,
각자의 고독은 지키라는 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려 하지 않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는 것.
좋은 관계는
서로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문장은
빠르게 읽고 지나가면
조금 아깝습니다.
손으로 한 줄씩 옮겨 쓰면
그제야 문장 안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두 번은 없다”는 말은
짧지만 오래 남습니다.
같은 하루는 없고,
같은 밤도 없고,
같은 순간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너무 익숙한 말인데도
책 속에서 다시 만나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쉽게 넘깁니다.
하지만 한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지금 이 시간이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 천천히 쓰게 됩니다.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은
많이 읽기 위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한두 문장만 읽어도
충분한 책이었습니다.
마음이 복잡한 날,
글을 쓰고 싶은데 시작이 어려운 날,
좋은 문장 앞에서 잠깐 멈추고 싶은 날에
잘 어울립니다.
이 책이 삶을 크게 바꾼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장을 따라 쓰는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건 분명했습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생각보다 달랐습니다.
눈으로 지나간 문장이
손을 거치면
조금 더 오래 남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좋은 문장을 모아둔 책이기보다,
문장 앞에서 잠깐 나를 정리하게 해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