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삶의 통찰과 비관적 사유로 유명했던 그는 당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후대에 영향력을 끼쳤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로, 근대 관념론의 황금기 속에서 독자적인 비관주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이다. 1788년 프로이센령 단치히(Danzig,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국제적 시야를 넓혔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는 개명한 상인이자 계몽주의적 성향의 인물로, 어린 아들에게 상인의 길을 기대했으나, 쇼펜하우어 본인은 일찍이 학자의 삶을 동경했다. 17세 때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자살로 여겨진다) 상당한 유산이 그에게 남겨졌고, 이를 계기로 그는 학문에 전념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당대 저명한 문인이자 살롱 주최자로서,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도 교류하였다. 그녀는 남편의 사망 후 바이마르로 이주해 문학 활동을 펼쳤고, 괴테와의 교류 속에서 아들 아르투어를 괴테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 만남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색채 이론에 흥미를 가져 후일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지만, 출판 후 괴테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또한 바이마르 시절 어머니의 살롱에서 인도 철학에 정통한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F. Majer)를 만나 불교와 인도 철학에 대한 평생의 관심이 촉발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러나 모자(母子) 사이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활발한 사교계 인사였던 어머니와 우울하고 예리한 성격의 아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30세 무렵 절연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1809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초반에는 의학을 공부했으나 곧 “인생은 불쾌한 일이다… 나는 내 인생을 그것을 성찰하는 데 바치기로 했다”는 결심을 할 만큼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괴팅겐에서 그는 플라톤과 칸트 사상을 배우며 철학적 기초를 다졌고, 1811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 등의 강의를 들었으나 학파 철학의 난해함과 신학적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베를린을 떠나 작은 도시 루돌슈타트에 칩거하며 박사학위 논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를 집필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에 대한 체계를 세워, 칸트가 말한 인식 형식들을 보완하려 하였다. 1814년경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칸트의 선험철학과 자신의 독창적 통찰인 의지 개념을 결합해 하나의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데 매진했고, 마침내 1818년말 자신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 첫 저작은 학계와 대중의 거의 아무 주목도 받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쇼펜하우어는 1820년 베를린 대학에 강사 자리를 얻어 명성을 쌓고자 했지만, 당시 독일 철학계의 거성 헤겔과 공개적으로 맞선 그의 시도는 무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강의 시간을 헤겔의 인기 강의와 겹치게 배정하면서까지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수백 명이 몰린 헤겔 강의와 달리 그의 강의에는 손에 꼽을 정도의 학생만이 나타났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그는 이후로도 학계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당대 주류 관념론 철학자들을 “협잡꾼”이라 부르며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설상가상으로 하숙집에서 이웃 여성과 말다툼 끝에 폭력시비로 피소되어 5년간 소송 끝에 평생 매년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패소 판결까지 받으면서 1820년대의 그는 암흑기의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 건강 악화와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번역 등 부업을 시도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학문적 성과도 정체되었다.
1831년 콜레라가 베를린을 덮치자(아이러니하게도 이 역병으로 라이벌 헤겔이 목숨을 잃었다), 쇼펜하우어는 서둘러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이후 그의 삶은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든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는 차츰 자신의 철학을 다듬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1836년 자연과학의 최신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하려 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대하여》를 출판했고 1839년에는 노르웨이 과학 아카데미 현상 논문 공모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로 1등 상을 받으며 평생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다. 이듬해 덴마크 학술원의 도덕 철학 공모에 〈도의 기초에 대하여〉를 제출하지만 심사위의 이해 부족으로 낙선하였고, 분개한 그는 두 수상 논문을 묶어 1841년 《윤리의 두 가지 근본 문제》라는 책을 펴내며 학계의 무지를 성토하기도 했다.
1844년에는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제2판을 출간하면서, 철학 체계를 보완하는 두 번째 분권(分卷)을 추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철학계의 시선은 싸늘했고, 그의 이름은 잊혀져 가는 듯했다. 그러던 중 1851년에 변화가 찾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일반 대중을 겨냥해 비교적 평이한 소품집 《부록과 잡편》(파레르가 & 파랄리포메나)을 출간했고, 이 책이 영국의 저널에 호의적으로 소개되면서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1853년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실린 익명 기사 「독일 철학의 우상파괴」에서 쇼펜하우어 사상이 재조명되자 독일 독자들도 비로소 그의 독창적 철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만년의 쇼펜하우어는 오랫동안 갈망하던 철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유럽 각지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그의 저술을 탐독하기에 이르렀다.
인생의 황혼기에 비로소 누린 명성 덕분에 쇼펜하우어는 이전보다 한층 밝아진 기분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규칙적인 일과를 보내며 저술과 독서에 몰두했는데, 특히 동양의 우파니샤드 경전을 늘 곁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고 한다. 괴팍하고 인간적인 모습 뒤에 동물에 대한 애정도 깊어, 여러 마리의 애완 푸들을 길렀는데 각각 ‘아트만(Atman)’ 또는 ‘부츠(Butz)’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 ‘참자아(眞我)’를 뜻하는 아트만이라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동물에게도 하나의 정신적 본질이 있다고 여겨 학자 스피노자가 동물을 단지 인간 목적의 수단쯤으로 본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1860년 9월, 프랑크푸르트의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평온히 숨을 거둘 때까지, 쇼펜하우어는 자신만의 통찰과 문체로 인간 존재와 고통에 대한 성찰을 이어갔다. 그의 유산은 1848년 혁명 진압군 출신 부상병들과 유가족을 돕는 데 기부되었는데, 이는 낙관적 진보나 혁명을 경계했던 그의 보수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쇼펜하우어의 생애는 당대 주류 철학에 도전했다 좌절하고, 긴 무명시절을 견디다 만년에 재평가받은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관념론의 득세, 1848년 혁명 등의 격동기가 있었지만, 그는 정치나 학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개인적 사유의 길을 걸었다. 오히려 칸트 이후 철학이 지나치게 낙관적 체계 구축에 몰두한다고 보고, 삶의 본질적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는 철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형성된 그의 사상은 기존의 낙관주의와 진보 사관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후 시대에 독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의지와 표상,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

쇼펜하우어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의지(Wille)’와 ‘표상(Vorstellung)’이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첫 문장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우리가 접하는 모든 세계가 각자의 인식 주관에 의해 구성된 현상임을 뜻한다. 여기서 표상이란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대상 세계의 모습을 가리킨다. 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아, 쇼펜하우어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 등의 형식이 우리의 정신에 내재한 틀이라고 보았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 곧 주관이 형상화한 현상계일 뿐이며, 그것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허용하는 방식대로만 펼쳐진다. 그는 “세계는 오직 주관에 대한 객체로서, 곧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하여, 세계의 존재는 인식하는 주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리적 사물과 객관적 사실들조차도 모두 ‘나의 표상’으로서 파악되며, 칸트가 말한 ‘물자체(物自體)’는 인간이 직접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는다.
하지만 쇼펜하우어 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칸트가 “물자체는 인식 불가능하다”고 한 한계를 넘어서, 어떻게든 물자체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대담한 시도였다. 그는 스스로 “칸트 철학 위에 세운 단층집”이라고 불렀던 바, 칸트의 토대 위에 자신의 의지 개념을 얹어 독창적 체계를 구축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예외적으로 물자체의 본성을 엿볼 수 있는 길을 하나 갖고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내면 경험이다. 우리는 외부 대상을 볼 때는 현상으로서 파악하지만,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는 대상화된 표상 너머의 실재를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기 신체를 이중적인 방식으로 파악한다고 보았다. 겉으로는 내 몸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의 객체(현상)로 인식하지만, 동시에 내면으로는 그 몸을 움직이고 욕구하며 느끼는 주체적 경험이 있다. 이 주관적 체험의 핵심에 자리한 것이 바로 ‘의지’다. 내가 팔을 뻗을 때 근육의 운동으로 보이는 그 현상의 이면에는 “팔을 뻗고자 하는 의지”라는 일차적이며 직접적인 동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의지는 나 자신의 본질로서, 원초적 욕구와 충동의 근원이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의 의지 경험을 보편화하여, 자연 만물이 바로 그러한 의지의 객관화라고 주장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근저에는 맹목적인 생존 충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원리를 가리켜 흔히 “생의 의지”(Wille zum Leben)라고 불렀다. 예컨대 식물이 햇빛을 향해 자라는 모습, 자석이 극성을 따라 움직이는 물리 현상, 심지어 돌이 땅으로 떨어지는 중력 현상까지도 모두 거대한 의지의 작용으로 볼 수 있다. 이때의 의지는 인간처럼 의식을 지닌 개별적 의지들이 아니라, 만물을 꿰뚫는 하나의 보편적 의지이다. 각 개인은 그 단일한 의지가 드러낸 현상(표상)일 뿐, 우리 모두의 깊은 본성은 동일한 하나의 의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나의 표상이고, 본질적으로는 나의 의지인 셈이다.
이 의지는 어떤 이성적 목적이나 계획을 가진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맹목적 충동으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존재케 하려고 부단히 움직일 뿐 어떠한 종국의 목표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의지를 일종의 맹목적이고 끝없는 “욕망의 흐름”으로 파악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이 끝없는 욕구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원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얻으면 권태가 찾아오고, 다시 새로운 갈망이 고개를 든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에 시달리고, 충족되면 잠깐의 만족 뒤에 곧 지루함에 빠진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진자운동에 비유하며, 행복이란 그저 고통의 일시적 중지일 뿐이라고 보았다. 결국 삶 전체가 고통이라는 불교적 통찰과 유사한 견해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가 비합리적이고도 무자비한 의지이기에, 그는 존재 자체가 근원적으로 비극적이라고 결론내렸다. 낙관주의를 “비참한 현실에 눈을 감은 어리석음”이라 일갈한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본질적으로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는 분명 최악의 세계를 만든 셈이며, 차라리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극단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이러한 음울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허무주의를 권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추구한 것은 이 고통스러운 삶의 상태를 초월하는 길이었다. 의지가 지배하는 한 세계는 끝없는 갈등과 결핍의 무대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이 의지의 사슬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궁극적 관심사는 “고통스런 삶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할 것인가”라는 물음이었으며, 그의 사유 전반은 이에 대한 다양한 해법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앞서 살펴본 의지 대 표상 이원론은 이러한 해법 논의를 이끌어가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요컨대, 쇼펜하우어는 먼저 세계와 인간을 표상(현상)의 영역과 의지(본질)의 영역으로 나누어 파악한 다음, 의지의 폭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경로를 사색한다. 그 경로의 실마리들은 예술과 미학, 도덕과 금욕적 성찰 등의 주제에서 발견되며, 이는 곧 쇼펜하우어 철학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구조와 핵심 내용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는 그의 철학 체계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흔히 철학사에서 가장 철저한 비관주의의 고전으로 꼽힌다. 이 책은 1818년에 집필을 마쳐 다음 해 간행되었고, 1844년에 쇼펜하우어가 대폭 보완한 제2판(2권본)이 출간되었다. 총 4권(四卷)으로 구성된 본서의 목차는 체계적인 논리를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1권과 2권이 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3권과 4권이 그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심화 논의를 담고 있다. 각 권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 – 여기서는 인식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쇼펜하우어는 데카르트 이후 철학이 당연시해온 주관-객관의 대립을 근본 원리로 삼아, “세계는 오로지 주관에 대한 객체(표상)로서 존재한다”는 테제를 전면에 세운다. 칸트의 영향 아래, 우리의 경험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인식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논증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박사논문 주제였던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형태를 설명한다. 그는 논리적 근거, 인과적 원인, 수학적 원리, 의지의 동기라는 네 차원에서 모든 사태는 충분한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보편 법칙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네 겹의 근거를 통해 인간은 질서정연한 표상의 세계를 경험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법칙일 뿐 궁극 실재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제1권의 결론은 칸트가 그렸던 그림과 유사하게,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의식의 구조를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며, 그 밖을 나가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 – 제2권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에서 가장 혁신적인 주장, 즉 “물자체는 곧 의지”라는 명제를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제1권에서 인식 주관이 형성한 표상의 베일을 벗겨내면 만나는 실재의 핵심은 맹목적 의지라고 그는 단언한다. 자기 몸을 통해 직감한 의지를 만물의 본질로 확장한 뒤, 온 세계가 의지의 다양한 객체화 과정임을 보인다. 이를테면 자연 전체는 거대한 의지가 투영된 그림자와 같으며, 각 종(種)의 보편적 양상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로 간주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이야말로 의지가 표상 세계에 드리우는 1차적 객체화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본형(本形)들이다. 그리고 개별적 사물들은 그 이데아들이 시·공간의 틀 안에서 구현화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의지 → 이데아 → 개별현상이라는 3층 구조로 세계를 파악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의 다양성과 변화를 근원적 통일성 위에서 조망한다. 제2권은 결과적으로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에 해당하며, 인간을 포함한 세계 만물이 왜 필연적으로 투쟁과 고통의 무대일 수밖에 없는지 그 근원을 밝힌다. 끝없는 욕망으로서의 의지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기에 결핍과 충돌을 야기하고, 개체들은 서로 생존 경쟁을 벌이며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비극이 전개된다.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말대로, “자연은 굶주림과 성욕으로 굴러가는 무대”인 것이다.
제3권: 예술을 통한 표상의 해방 – 앞의 논의가 다소 암울하게 끝맺었다면, 제3권부터는 그 어둠 속에서 발견하는 탈출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통로로 미적 경험, 즉 예술과 아름다움을 제시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미적 황홀경에 빠질 때, 인간은 일시적으로 개별적 욕망을 잊고 순수한 인식 주체로 남게 된다고 보았다. 이를 “무관심한 관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순간에는 개인으로서의 고뇌와 의지의 압박이 사라지고 마치 투명한 거울처럼 세계를 비추는 순수 정신 상태에 도달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이 다름 아닌 플라톤적 이데아들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예술적 영감 속에서 우리는 사물들의 보편적 본질을 직관하게 되고, 일상의 표상들이 갖는 실용적·개인적 의미를 넘어서는 영원한 형식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의지의 노예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고통을 잊게 해주는 일종의 구원의 역할을 한다. 제3권에서는 여러 예술 양식이 이러한 구원에 기여하는 정도를 서열짓는데, 자연미, 건축, 조각, 회화, 시, 비극 등을 차례로 논하고 최상의 위치에 음악을 둔다. 특히 음악은 다른 예술이 모두 이데아를 매개로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비해, 곧장 의지 자체를 표출하는 예술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음악은 별도의 이데아를 거치지 않고도 우리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의지의 심장박동을 그대로 들려주는 예술로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요컨대 제3권은 쇼펜하우어 미학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예술을 통한 일시적 해탈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제4권: 삶의 고통과 의지의 부정 – 마지막 제4권에서는 윤리적 성찰과 존재론적 결론이 제시된다. 앞서 의지의 본성은 끝없는 갈망과 투쟁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이 물음에 대해 먼저 도덕의 근거를 논한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동인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기심, 악의(잔인함), 동정심(연민)이 그것이다. 이 중 진정한 도의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직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연민뿐이라고 보았다. 이는 인간 개별자가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의지의 발현이라는 통찰에서 연유한다. 타인의 괴로움이나 행복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이타적 선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윤리는 칸트의 의무론이나 공리주의 등의 이론과 달리 직접적이고도 인간적인 도덕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한편, 윤리적 삶의 극치로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길, 즉 금욕과 자비의 삶이다. 여기서 성인이란 특정 종교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모든 집착을 버리고 의지의 족쇄를 끊어낸 존재를 말한다. 그는 기독교의 성인, 힌두교의 요기, 불교의 수도승 등에서 그 예를 찾았고, 이러한 삶을 통해 의지의 자기부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의지가 발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사슬도 함께 끊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두고 “의지의 소멸” 혹은 “해탈”이라고 표현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근본 의지인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만이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해법으로 제시된 셈이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 현상계 너머의 열반(Nirvana) 혹은 허무(Nichts)에 가까운 평온이 기다린다고 암시한다. 다만, 이 경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경험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 제4권의 결론은 독자에게 조용한 성찰을 남긴 채 끝난다.
이처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식론-형이상학-미학-윤리학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며, 쇼펜하우어 철학의 전모를 집약하고 있다. 출간 당시에는 주류 철학과 어긋나는 독특함 탓에 거의 외면받았지만, 후대에 이 책은 동서양의 사상을 융합한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특히 명쾌하고 우아한 문체로 독일어로 쓰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이나 피히테 같은 당대 철학자들의 난해한 문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철학은 분명한 언어로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글은 비유와 풍자를 곁들인 문학적 필치로 읽는 재미를 주며, 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시대를 넘어 꾸준히 독자를 확보한 비결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책 한 권으로 쇼펜하우어는 서구 최초의 철저한 비관주의 철학자이자, 동양의 지혜를 서양철학에 투영한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미학과 예술관
쇼펜하우어 철학의 밝은 측면을 찾아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미학(美學)이다. 비록 그의 전반적 세계관은 암울하지만, 예술에 관한 한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찬사를 보낸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였다. 앞서 요약한 바와 같이, 그는 예술을 의지로부터의 도피처로 여겼다. 우리의 눈을 현실 세계의 고통에서 떼어내어 아름다움의 세계로 돌릴 때, 일시적으로나마 구원에 가까운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美)는 고통을 잊게 하는 약”이요, 예술 작품은 “삶의 비극을 잠재우는 자장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미적 경험이란 곧 이데아의 인식이라고 보았다. 가령 한 송이 꽃을 바라볼 때, 평소에는 그 꽃을 자신의 욕망과 관계지어 파악하지만(예쁘다, 가지고 싶다 등), 미적 관조에 들어가면 꽃 자체의 순수한 형상, 즉 꽃 종(種)의 이데아를 직관하게 된다. 이 순간 우리는 개별적 주체로서의 경계를 잊고 순수한 인식 주체로 승화한다. 이러한 탈개인화 상태에서는 더 이상 배고픔이나 두려움, 욕망 같은 의지의 신호가 들리지 않게 되고, 마음에 고요한 충족감이 깃든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침묵하면 남는 것은 순수한 인식”이라고 말하며, 예술작품 앞에서 느끼는 황홀은 바로 그 의지의 침묵에서 온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러 예술 형식들을 평가하면서, 각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의지를 넘어서게 하는지 논했다. 건축은 무거운 물질과 압력, 경중의 균형을 다루는 예술로서, 물질적 자연에 내재한 의지의 양상을 드러낸다. 건축미를 감상할 때 우리는 물체들이 중력을 거스르고 서 있는 형태의 이상(理想)을 보고 경탄하게 된다. 조각은 인체의 미를 형상화하여 인간이라는 이데아를 표현하고, 회화는 색채와 구도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한다. 시와 문학은 인간 삶의 다양한 국면을 서사로 보여주며, 특히 비극은 삶의 고통과 숙명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슬픔을 정화시킨다. 쇼펜하우어는 비극을 높은 평가했는데, 비극 작품 속 주인공이 겪는 불행을 통해 관객은 의지의 덧없음을 깨닫고 나아가 체념과 동정의 감정을 배우게 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의지의 부정으로 향하는 통찰을 심어주기에, 비극은 아주 고귀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 형식들 가운데 음악이 으뜸으로 꼽힌다. 음악은 앞서 언급했듯 의지의 직접적 표상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예술이 의지의 그림자를 쫓는 동안 음악은 의지 그 자체를 닮은 언어를 사용한다. 예컨대 밝은 조성의 선율이 주는 기쁨, 느린 템포의 저음이 주는 우울함 등은 특정 장면이나 이야기가 없어도 우리 감정에 호소한다. 마치 우리 내면의 의지가 스스로를 연주하는 것처럼, 음악은 인간 심성을 직접 파고든다. 그래서 그는 “음악은 세계의 보편적 언어”라고까지 칭송했다. 이러한 음악 예찬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를 탐독한 뒤 자신의 오페라에 그의 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유명하다(《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작품에서 쇼펜하우어적 비극미와 구원의 테마가 두드러진다).
정리하면,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은 예술을 통해 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이 미적 해방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고통의 중지를 경험케 해준다. 예술가는 이러한 해방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천재적 매개자로서, 그의 눈에는 세계의 이데아가 투명하게 비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예술가를 두고 “의지의 마법을 푸는 마법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미학은 인생의 비극을 견디게 하는 위안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쇼펜하우어의 윤리관과 삶의 지혜

쇼펜하우어의 윤리사상은 그의 비관적 세계관 속에서도 일종의 따뜻한 핵으로 자리한다. 그는 인간과 생명이 본래 고통스럽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면서도, 그 고통을 줄이고 서로를 연민하는 태도를 최고의 선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바로 연민의 윤리다. 당대에 유행하던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이나 헤겔 학파의 도덕 체계와 달리, 쇼펜하우어 윤리의 핵심은 차가운 이성 계산이 아닌 따뜻한 마음의 충동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행동의 원천으로 이기심, 악의, 동정심 세 가지를 들었다. 이기심(self-love)은 자기 보존과 이익 추구를 위한 본능적 경향으로, 도덕적으로 중립이지만 대부분의 행위를 지배한다. 악의(malice)는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드문 동기인데, 이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이며 악마적인 행위의 원인이다. 마지막으로 동정심(compassion)은 타인의 괴로움을 자기 것도양 느끼는 공감으로, 오직 이것만이 진정한 도덕성의 기초가 된다. 왜 하필 동정(연민)이 도덕의 근본인가?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연민은 자아의 경계를 허무는 감정이다. 내가 아닌 타자의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볼 때 나와 너를 가르는 인식의 장벽이 무너지는 체험이다. 그것은 마치 한 의지의 두 표현인 우리가 본래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이며, 따라서 연민에 기반한 행위는 더 큰 전체로서의 자신을 위한 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통찰 덕분에 우리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베풀 수 있고, 그 속에서 오히려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 셈이라고 그는 보았다.
구체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채식주의나 동물 보호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동물도 우리와 같은 고통을 느끼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삶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어서, 불필요한 살생이나 학대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앞선 감수성이었으며, 그를 서양 철학자 중 초기 동물권 옹호자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또한 자선행위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 역시 연민의 발로로 장려되는데, 이러한 덕행들은 고통을 줄이는 일이기에 그 자체로 삶의 가치를 높인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쇼펜하우어는 행복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행복이란 고통의 부재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며,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감소를 윤리의 목표로 삼았다. 결국 삶을 덜 불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도덕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관의 궁극에는 의지의 부정이라는 이상이 놓여 있다.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앞서 본 제4권의 결론부에 해당하며, 쇼펜하우어 철학 전체를 통한 하나의 해탈론(解脫論)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성인(聖人) 또는 현자(賢者)의 모습에서 의지의 부정을 실현한 인물을 찾았다. 이들은 더 이상 삶에서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없이 완전한 평정심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 예로 기독교의 금욕주의 성인들, 힌두교의 수행자, 불교의 아라한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자비와 평온 속에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의지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삶이라고 찬탄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존재에 따르는 고통이 더 이상 나를 어찌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을 등지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최상의 지혜로 간주된다.
물론 쇼펜하우어 본인이 이러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때로는 냉소적이고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으며, 성정이 괴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을 통해 전하고자 한 윤리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고통받는 이웃을 도와라. 가능한 한 해를 끼치지 말라.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삼가라.” 이는 동서양 여러 종교와 맥을 같이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말년 삶을 보면 사치나 명예욕과 거리를 두고 소박하게 지내면서, 저술을 통해 인류 보편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리고 유언으로 남긴 재산마저 전쟁 상이병을 돕는 데 기부했듯이,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자신의 마지막 의지를 사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비관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인간애를 내포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리하면, 쇼펜하우어의 윤리관은 연민을 통한 도덕, 금욕을 통한 해탈로 요약된다. 그는 우리가 모두 하나의 본질로 연결되어 있음을 역설했고,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과도한 욕망을 경계하고, 가능하다면 의지의 족쇄를 풀어내는 것이 최고로 지혜로운 삶의 태도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윤리적 통찰은 비록 어둡고 냉혹한 현실 인식 위에 피어난 것이지만, 그만큼 현실의 괴로움에 진지하게 맞닥뜨린 데서 우러나온 조언이라 할 수 있다.
칸트 철학과의 관계, 계승과 비판
쇼펜하우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와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스스로 “칸트 없이는 내 철학도 없다”고 인정할 만큼 칸트 철학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실제로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 위에 세워졌다. 칸트가 뉴턴 이후 서양 지성에 지진을 일으킨 것은 “인간이 인식하는 대로만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선험적 관념론이었다. 쇼펜하우어 역시 이 점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세계를 표상이라는 틀로 파악한 것이다. 칸트가 말한 현상계와 물자체의 구분, 시간·공간의 주관적 성격, 인과율 등 범주의 인간 의식 의존성 등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을 이룬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위대한 발견으로 “인과법칙은 오직 현상계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꼽았다. 이는 곧 인간 이성이 형이상학적 물음(세계의 최초 근거, 궁극 목적 등)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이 한계를 쇼펜하우어는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성의 힘을 맹신했던 이전 철학에 종지부를 찍은 칸트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주요 저술 곳곳에는 칸트 철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일례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칸트 철학 비판”이라는 긴 부록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난해한 표현과 불필요한 개념 도입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12범주표 등에 대해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쇼펜하우어는 범주들을 일일이 구분할 것 없이 충족이유율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칸트가 설정한 물자체의 불가지성에 대해서도, 엄밀히 말하면 칸트 자신이 모순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칸트가 인과성을 현상에만 한정지어 놓고도, 인과성에 기대어 인간 밖에 ‘것들 자체’가 존재한다고 추론한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한편, 칸트가 도덕법칙을 절대시하고 그것을 근거로 신과 영혼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칸트가 기독교적 체면을 차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초월적 가정을 도덕에 끌어들였다고 보고, 이는 칸트 철학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디까지나 칸트의 위업 위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견해로는, 칸트가 현상 너머 물자체의 존재를 가정한 것은 옳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자체는 알 수 없다”에서 멈춘 칸트에게 아쉬움을 느낀 쇼펜하우어는, “물자체가 무엇인지를 한 번 밝혀보자”며 과감한 도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답을 의지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쇼펜하우어는 칸트 체계가 남긴 형이상학적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그는 칸트야말로 자기 철학의 아버지요, 불교는 어머니라는 비유까지 했는데, 그 정도로 칸트 철학을 기반 삼아 자신만의 독창적 사상을 낳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관계는 “근본적인 동의 위의 선택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칸트의 손을 잡고 출발하였으되, 더 나아가 그가 미처 못다 한 작업을 이룸으로써 스승을 넘어서려 한 제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영향과 차별점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나, 그의 사상은 한 천재 철학자에게로 다시 살아났다. 그 철학자는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이다. 니체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를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 숭배했고, 심지어 그를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로 칭하기도 했다. 니체의 저작 《쇼펜하우어라는 교육자》(1874)는 이러한 경외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글에서 니체는 당시 독일 문화의 타락을 한탄하며 쇼펜하우어의 진정성과 개인적 사유의 용기를 칭송했다. 즉, 대학 교수나 체계 철학자가 아닌 “진짜 철학자”의 모범으로 쇼펜하우어를 내세운 것이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에게서 받은 영향은 초기 사상 곳곳에 나타난다. 첫째로 비관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니체는 19세기 유럽에 만연하던 낙관주의와 기독교 도덕에 반기를 들었는데, 세계의 어두운 면을 직시한 스승에게서 용기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예술의 중시이다. 니체의 최초 저서 《비극의 탄생》은 그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쓴 책으로, 비극 예술 속에서 삶의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 했다. 여기서 음악을 디오니소스적 진리의 표현으로 본 관점 등은 쇼펜하우어 미학의 흔적을 많이 품고 있다. 셋째로 의지 개념의 계승이다. 니체는 나중에 쇼펜하우어 식 “생의 의지” 대신 “권력에의 의지”라는 독자 개념을 내놓지만, 우주적 원동력으로서의 의지라는 발상 자체는 쇼펜하우어에게 빚진 것이다. 즉 이성보다 의지가 근원적이라는 통찰이 니체 철학의 전제에 깔려 있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기보다 충동적/본능적 존재로 파악한 관점도 두 사람을 잇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결국 쇼펜하우어에게서 결별하게 된다. 핵심 쟁점은 인생에 대한 태도였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괴로움 투성이므로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 결론에 이르렀지만, 니체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니체 철학의 키워드가 “삶의 예스(Yea-saying)”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쇼펜하우어가 의지의 부정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자 한 것을 “나약한 부정”이라고 보았다. 니체는 오히려 고통을 포함한 삶 전체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향했으며, 이를 운명애(Amor fati)라 불렀다. 그에게 쇼펜하우어의 금욕과 자비 윤리는 일종의 데카당스(퇴폐), 즉 삶을 향한 등돌림으로 비쳤다. 니체는 기독교의 자기희생 도덕과 불교의 열반사상을 비판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생을 거부하는 병적 증상으로 혹평했다. 특히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쇼펜하우어를 가리켜 “삶을 등진 현자”, “비관주의에 사로잡힌 환자” 등으로 묘사하며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하지만 니체의 이러한 태도 변화를 꼭 배신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니체 사상의 발전과정에서 쇼펜하우어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산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인생의 허무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기존의 거짓 희망들을 무너뜨렸다면, 니체는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긍정의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도, 어떤 면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열어준 허무의 공간을 직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만 쇼펜하우어가 그 허무 속에서 고요한 부정에 머물렀다면, 니체는 거기서 춤추는 긍정을 만들어내려 한 점이 다르다.
결국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관계는 깊은 영향과 결별로 요약된다. 니체는 젊은 시절 스승에게 철학적 양분을 듬뿍 섭취했고, 성숙한 뒤에는 그 영양분을 바탕으로 정반대의 꽃을 피워냈다. 니체 철학의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위버멘쉬(초인) 등의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솟아난 것들이다. 이렇듯 사상사의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한 지평선의 양 끝처럼 자리하며, 이후 철학자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통찰을 동시에 유산으로 남겼다.
불교 철학과의 접점, 동양 사상의 영향
쇼펜하우어 철학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축은 동양 사상, 특히 인도 철학과 불교와의 친연성이다. 그는 서양 근대 철학자들 중 드물게도 동양의 지혜에 깊이 매료된 인물이었다. 앞서 그의 생애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젊은 시절부터 산스크리트 경전의 일부를 접하고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평생 우파니샤드와 불경 등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라틴어로 번역된 우파니샤드 모음집(Oupnek’hat)을 늘 곁에 두고 “평생의 위안”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전 세계 어떤 공부도 우파니샤드만큼 유익하고 고양되지 않는다”라는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침실 책상 위에는 우파니샤드 책이 펼쳐져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는 동양 사상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우선, 세계관의 유사성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인도 교설 사이의 놀라운 공통점을 수차례 언급했다. 예컨대 마야(Māyā) 개념—현상계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그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념과 통한다. 또 브라만-아트만의 통일 사상—우주의 근본 원리(브라만)와 개인의 참자아(아트만)가 하나라는 가르침—은 그의 보편적 의지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즐겨 쓰던 말 중에 “타틀 트밤 아시(Tat Tvam Asi)”가 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로 “그대는 그것이다” 즉 만유일체를 뜻한다. 그는 이 구절이야말로 자신이 설명하고픈 바를 함축한다고 여겼다.
특히 불교와의 접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가장 만족스러운 형이상학적 종교”라고 평했다. 무엇보다 삶은 고통(Dukkha)이라는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를 그는 철저히 공감했다. 또한 고통의 원인은 갈애(집착)라는 가르침은 자신의 의지=욕망 이론과 일맥상통함을 발견했다. 해탈을 통한 고통의 소멸이라는 불교적 구원론 역시 그의 의지의 부정과 닮아 있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불교가 없었다면 내 윤리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는 불교의 열반(Nirvāṇa)을 의지가 완전히 소멸한 상태로 해석했고, 열반에 이르지 못한 중생의 세계를 윤회의 수레바퀴로 묘사한 것에 깊이 동의했다. 나아가 연기(緣起)나 무아(無我) 사상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 비록 자신은 만물의 본질을 단일한 의지로 보았으나 개인적 자아의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은 연민의 윤리를 뒷받침하는 통찰로 받아들였다.
물론 학자들은 쇼펜하우어가 동양 사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해탈은 열반(적멸)으로서 더 이상 윤회의 고가 반복되지 않는 해방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다소 허무주의적 색채로 묘사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는 열반 상태를 “아무 것도 아니지만 또한 모든 것인 상태”로 설명하며, 의지적 충동이 완전히 사라진 경지를 어떤 적극적인 복됨이라기보다 ‘무(無)’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이는 불교의 본래 가르침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윤회사상을 받아들여 삶의 고통이 반복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업설(業說)이나 윤회의 기제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동양의 지혜에서 자신의 철학을 보강하는 넓은 공감대를 찾았지만, 완전히 같은 입장에서 사고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가 동양 사상을 서양 철학 담론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는 점은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19세기 유럽은 제국주의적 우월감으로 동양을 타자화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거꾸로 동양의 현인들—특히 붓다—에게서 삶의 답을 구했다. 쇼펜하우어는 “만약 나에게 철학을 상징하는 형상이 필요하다면, 나는 십자가 대신 연꽃 위에 앉은 부처의 형상을 택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사유에 불교적 색채가 얼마나 깊이 배어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집필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경전을 직접 읽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당시 구할 수 있던 여러 동양 철학 연구서와 번역서를 참고하여 자기 이론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곳곳에도 힌두교와 불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파레르가와 파랄리포메나》 등의 후속 저술에서는 동양 사상에 대한 견해를 더 풀어놓기도 했다.
요약하면, 쇼펜하우어 철학과 불교/인도 철학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현상은 환영이고, 집착이 고통을 낳으며,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사상은 양쪽 모두에 흐른다. 차이는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적 축으로 체계를 세웠고, 불교는 실천적 수행과 자비를 더욱 강조한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서구 사상가로서 처음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철학의 일부로 삼았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동서양 사상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많은 서양 지식인들이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깊은 사유를 접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불교 철학의 서구 수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이 되었다.
현대적 해석과 영향력

쇼펜하우어는 생전에 고독한 사상가였으나, 사후에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철학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비관적 통찰과 독특한 미학, 그리고 동양적 색채의 형이상학은 여러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철학 분야에서, 쇼펜하우어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표현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필리프 마인랭더나 뒤르инг, 폰 하르트만 등이 그의 비관주의 전통을 이어갔다. 특히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은 무의식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이는 의지 = 무의식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발전시켜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례였다. 실제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카를 융 같은 심리학자들도 쇼펜하우어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무의식적 충동(리비도)이 지배한다고 보았는데, 그러한 생각의 토대에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프로이트 자신은 이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쇼펜하우어와 만나게 된다”는 심리학사 연구자들의 평이 있다.
문학과 예술 영역에서는 더욱 다채로운 영향이 감지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를 탐독한 후 인생관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나 《전쟁과 평화》 등에는 쇼펜하우어적 허무와 동정의 정서가 스며 있다는 분석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쇼펜하우어의 미학에 심취하여,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독일의 토마스 만은 에세이 〈쇼펜하우어〉에서 그를 “예술가들의 철학자”라 칭하며 경의를 표했고, 자신의 작품들(특히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 등)에 그의 사상을 녹여냈다. 음악 분야에서는 앞서 언급한 리하르트 바그너가 가장 유명한 예이다. 바그너는 1850년대 중반 쇼펜하우어를 접하고는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말할 만큼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작곡한 오페라들에서 사랑을 통한 구원, 욕망의 파멸 같은 테마를 강조한 것은 쇼펜하우어 영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나 구스타브 클림트 등도 인간의 욕망과 죽음, 구원에 관한 그림들에서 쇼펜하우어적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평을 듣는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쇼펜하우어는 실존주의와 허무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 같은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맞닥뜨린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쇼펜하우어에게 싹트고 있었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이들과 달리 탈출의 가능성(예술과 금욕)을 제시했지만, 근원적 부조리의 인정이라는 점에서는 맥이 닿아 있다. 또한 프리드리히 니체를 비롯해 뤼디거 사프란스키 등이 지적하듯, 쇼펜하우어는 20세기 철학의 반(反)이성주의 흐름을 예견한 인물이었다. 이성의 힘보다 맹목적 의지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그의 사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진보와 이성에 대한 회의에 빠진 현대인들의 정서와도 통했다. 실제로 대공황이나 세계대전 시기에 쇼펜하우어의 저작 판매가 급증하고, 그의 인기가 다시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 과학과의 대화에서도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거론된다. 예컨대 생물학의 진화론은 생명의 맹목적 의지가 끝없는 경쟁을 벌인다는 그의 관찰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것이 1859년으로 쇼펜하우어가 죽던 해였는데, 그는 생전에 이를 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의지의 투쟁이라는 그림은 훗날 진화론의 적자생존 개념과도 상응하는 통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대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의사결정에는 의식적 이성보다 무의식적 충동이 선행한다는 결과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성은 의지의 하인”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시대를 앞선 심리학으로 재평가받기도 한다.
끝으로, 쇼펜하우어 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꼽자면 무엇보다 동서양 사유의 융합과 삶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철학계는 문화와 전통을 넘어 보편적 인간 문제를 논의하려 하고, 동양 철학의 지혜도 세계 철학사 일부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쇼펜하우어는 서구 철학에 동양적 관점을 수혈한 선구자로 재조명된다. 또한 그의 비관주의 철학은 기술과 물질 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허무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거울을 제공한다. 행복과 낙관만을 강조하는 담론들 사이에서, 고통을 직시하고 연민을 호소하는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는 귓가에 남는 울림이 있다. 삶이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되, 예술과 도덕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해탈을 모색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낙관도 비관도 어려운 시대에 색다른 통찰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흔히 “철저한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긴 여정의 끝에 돌이켜보면, 그의 철학은 삶의 어둠을 인정하면서도 예술의 빛과 도덕의 온기를 붙잡으려 한 철학,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사상의 정수다. “세상은 지옥이지만, 예술에는 천국이 있다”는 듯한 그의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비록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우리를 얽매지만, 깨달음을 통한 해탈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역설적 희망을 그는 남겼다. 이렇듯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본 동시에 거기서 건져올릴 지혜를 모색한 사색가로서, 시대를 넘어 지속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깊이와 울림을 지닌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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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및 링크
- ( Arthur Schopenhaue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Arthur Schopenhauer: 쇼펜하우어의 생애 후반기와 철학적 영향에 대한 개괄
- (Schopenhauer, Arthur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Schopenhauer, Arthur: 쇼펜하우어의 주요 저작과 업적에 대한 정리
- (Schopenhauer, Arthur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Schopenhauer’s Life: 쇼펜하우어의 드레스덴 시절 저술 활동과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집필 언급
- ( Arthur Schopenhaue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대학 강의 시도와 헤겔과의 갈등 내용
- (Schopenhauer, Arthur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IEP –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학업 과정과 “인생은 불쾌한 것…”이라는 그의 결심에 관한 기술
- ( Arthur Schopenhaue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 쇼펜하우어 의지 개념과 독일 관념론(피히테, 헤겔 등)과의 대비 설명
- (Arthur Schopenhauer – Wikipedia) Wikipedia – Arthur Schopenhauer: 쇼펜하우어 철학의 개요 (의지와 표상의 세계관, 칸트 및 인도철학 영향)
- (16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브런치 스토리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와 칸트 철학의 관계를 쉽게 해설한 글
- (Arthur Schopenhauer – Wikipedia) Wikipedia – 동물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입장 언급 (애완견과 동물 윤리에 관한 내용)
- (The Upanishads state that in our true nature, as Consciousness …) Reddit – Schopenhauer on Upanishads: 쇼펜하우어의 우파니샤드 예찬 발언 인용 (영문)
- ([이주향칼럼] 쇼펜하우어의 해법 – 세계일보) 세계일보 – 쇼펜하우어의 해법: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다… 궁핍하면 고통이고, 풍요로우면 권태” 등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어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