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후기, 유전자가 이기적이면 인간도 이기적일까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이 본래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닙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 대상은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치며 복제되는 유전자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된다면, 부모의 희생과 협력처럼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40주년 기념판 책 표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40주년 기념판

THE QUESTION

이기적인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과 인간이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뜻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유전자가 실제로 욕심을 내거나 자신의 생존을 계획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자에는 사람과 같은 의도나 감정이 없습니다.

생물이 번식하는 과정에서는 유전 정보가 복제됩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변이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준 일부 유전 정보가 다음 세대에 더 많이 남을 수 있습니다.

도킨스가 사용한 ‘이기적’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결과를 사람의 언어로 압축한 표현입니다.

흔히 오해한 문장
유전자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명령한다.
다시 쓴 문장
개체의 몸과 행동에 영향을 준 유전자 가운데 복제에 유리했던 변이가 여러 세대를 거치며 더 많이 남을 수 있다.

살아남은 유전자가 미래를 미리 알고 특별한 전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복제에 유리했던 유전 정보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기적 유전자 뒷표지와 과학 교양서 소개 문구

인간의 성격이 아니라 진화가 작동하는 단위를 묻는 책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생물이 더 착했는지, 더 영리했는지를 평가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유전적 차이가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유전자 집단의 비율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유전자에게 의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복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에 가깝습니다.

몸이 ‘생존 기계’라는 말은 인간을 낮추는 표현일까

도킨스는 생물의 몸을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생존 기계’라고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감정과 관계까지 유전자 전달을 위한 도구로 축소하는 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표현이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생존 기계라는 말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판결이라기보다, 진화를 어느 위치에서 바라볼 것인지 보여주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유전자 중심으로 진화를 바라보는 흐름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다
그 변이가 몸의 특징이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생존과 번식 결과에 차이가 생긴다
다음 세대의 유전자 비율이 달라진다

개체의 삶은 한 세대 안에서 끝나지만, 복제된 유전 정보는 여러 몸을 거치며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몸을 유전자의 운반체로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체보다 오래 이어지는 복제 정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이기적 유전자 차례와 복제자 불멸의 코일 항목

복제자와 생존 기계의 개념에서 시작하는 책의 앞부분

‘생존 기계’는 인간의 의미를 낮추는 말이라기보다,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관찰 위치입니다.

유전자 중심 관점에서도 이타적 행동은 진화할 수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기적으로 복제되는 유전자와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거나 어떤 동물이 가까운 친족을 보호하는 행동은 행동하는 개체에게 시간과 에너지, 위험이라는 비용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는 상대가 같은 유전 정보 일부를 공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친족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통해 관련 유전 정보가 다음 세대에 남을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이타성과 일상의 이타심은 다르다

진화생물학에서 이타적 행동은 행동한 개체에게 비용이 들고, 상대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이 선의와 공감을 느꼈는지, 도덕적인 의도로 행동했는지를 직접 평가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흔히 오해한 문장
사랑과 희생도 유전자의 전략일 뿐이니 결국 가짜다.
다시 쓴 문장
어떤 행동이 진화한 배경을 설명하는 것과, 그 행동을 하며 개인이 느끼는 사랑과 감정의 진실성은 서로 다른 문제다.

부모의 돌봄이 진화적으로 어떤 이점을 가졌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부모가 느끼는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은 행동이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었던 조건을 설명하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감정의 의미까지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차례의 유전자 기계 공격 유전자의 행동 방식 가족계획 항목

행동과 갈등,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다루는 중반부 목차

친족이 아닌 상대와도 협력이 가능한 이유

협력이 친족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서는 상대의 도움만 받고 돌려주지 않는 행동이 장기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이익보다 반복되는 관계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협력이 유지되기 쉬운 조건

  • 상대와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 누가 협력했고 누가 배신했는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 배신하면 이후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서로 협력했을 때 얻는 장기적인 이익이 충분합니다.

이 관점에서 경쟁과 협력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이 아닙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상대보다 먼저 이익을 차지하는 행동이 유리할 수 있고, 다른 조건에서는 협력과 신뢰를 유지하는 행동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선한지 악한지를 판정하기보다, 어떤 조건에서 협력과 갈등이 나타나는지를 보는 것이 이 책의 방식에 가깝습니다.

유전자는 영향을 주지만 우리의 운명을 판결하지 않는다

유전자 중심의 설명은 종종 “인간의 행동은 이미 유전자에 정해져 있다”는 유전자 결정론으로 오해됩니다.

하지만 유전자가 행동과 성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과 모든 행동이 태어날 때 확정된다는 말은 다릅니다.

같은 유전적 조건도 성장 환경과 학습, 문화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의 성향을 돌아보고 규칙을 만들며, 교육과 제도를 통해 행동을 조절합니다.

흔히 오해한 문장
유전자가 결정한 행동이므로 인간은 바뀔 수 없다.
다시 쓴 문장
유전적 영향은 행동을 만드는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환경과 학습, 문화와 상호작용한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공격성이나 경쟁, 성 역할과 같은 행동에 진화적인 배경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그 행동이 옳다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행동이 왜 나타났는지를 설명하는 과학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윤리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대신 결정하는 명령문은 아닙니다.

이기적 유전자 차례의 세대 간 전쟁 암수의 전쟁 사회성 곤충 협력의 진화 항목

갈등과 성 선택, 사회성과 협력의 진화를 다루는 목차

밈은 유전자 밖의 새로운 복제자가 될 수 있을까

책의 후반부에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밈’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도킨스가 처음 제안한 밈의 범위는 인터넷 사진이나 유행어보다 넓습니다. 노래와 언어, 종교와 사상, 행동 방식처럼 모방을 통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되는 문화적 정보를 가리킵니다.

어떤 생각은 많은 사람에게 빠르게 복제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합니다. 어떤 것은 오랫동안 살아남지만 다른 것은 금세 사라집니다.

유전자와 밈을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밈은 문화도 복제와 변형, 선택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비유이자 가설적인 개념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유전자처럼 명확한 물질적 단위와 복제 방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콘텐츠가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모방과 변형을 거쳐 다시 퍼지는 지금의 인터넷을 떠올리면 밈이라는 비유는 더욱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다만 어떤 정보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 그 정보가 정확하거나 좋은 생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복제에 유리한 것과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차례의 밈 새로운 복제자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 유전자의 긴 팔 항목

밈과 협력,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목차

책을 읽기 전과 후에 달라진 세 문장

읽기 전

인간은 유전자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읽은 후

이기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성격보다 유전자가 세대에 남는 결과를 설명한다.

읽기 전

이타적인 행동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과 모순된다.

읽은 후

유전자 중심 관점에서도 친족 선택과 반복되는 관계를 통해 이타적 행동과 협력이 진화할 수 있다.

읽기 전

유전자가 행동을 결정하므로 인간의 선택은 의미가 없다.

읽은 후

유전자는 행동에 영향을 주는 한 조건이지만, 환경과 문화, 학습과 개인의 선택도 함께 작용한다.

젊은 시절의 이기적 유전자 저자 리처드 도킨스 사진

《이기적 유전자》 초판 출간 무렵의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복제자와 친족 선택,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처럼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이어집니다.

모든 장을 한 번에 이해하려 하기보다 “이기적으로 복제되는 유전자에서 협력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따라가니 책의 흐름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기적 유전자’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책을 덮은 뒤에는 생명의 행동을 어느 위치에서 설명할 것인지 묻는 문장으로 읽게 됐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책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복제되는 유전자의 관점에서도 협력과 이타적 행동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책으로 읽혔습니다.

유전자의 관점은 사랑과 협력을 가짜로 만드는 설명이 아니라, 그 복잡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