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정말 ‘나’일까?
그 사람이 보는 내가 나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만들어낸 나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은 바로 그 혼란의 틈을 깊숙이 파고든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동시에 이상하게 끌렸다. 단단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놓인 질문들은 조용하지만 강했고, 무엇보다도 오래 남았다.
삶과 관계, 존재에 대해 평소엔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쿤데라는 짧지만 날카롭게 꺼내놓는다.
이번 글에서는 읽으며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던 문장들을 중심으로, 내가 왜 이 책을 오래도록 붙잡게 됐는지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어떤 소설은 이야기보다 질문을 더 오래 남긴다. 『정체성』이 그랬다.
밀란 쿤데라 『정체성』 표지

밀란 쿤데라 전집 중 아홉 번째 작품인 『정체성』은 사랑과 기억, 그리고 자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표지에 담긴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이 책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정체를 잃은 듯한 인물들의 형상이, 우리가 ‘나’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꿈은 현실 위에 떠 있는 무의미한 환상일까

샹탈은 꿈조차 현실의 틀 안에서 존재한다고 여긴다. 현실과 시간, 감정의 방향성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인간의 존재감도 희미해진다. 그녀의 내면에는 현재를 붙잡지 못하는 불안과 동시에 현실에 종속되고 싶지 않은 강한 저항이 교차한다.
기억의 고백이 남기는 흔적

장마르크는 과거의 상처를 회상하며, 친구 관계에 대한 염세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관계의 필요조건이 ‘기억’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그것이 때론 족쇄가 되기도 한다는 걸 고백한다. 이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친밀감과 거리감 사이의 균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왜 살아가는가’이다. 이 대목에서 쿤데라는 삶의 본질을, 이름도 없는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묘하게 불안하고도 침착하게 풀어간다.
무관심이 만든 정체성의 상실

과거의 죄의식이 오늘날엔 무관심으로 대체되었다는 문장. 인간 존재가 점점 더 가볍고, 불분명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정체성이란 결국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 운명의 증거인가

정체성은 타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는 두 인물이 서로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인식이 관계의 의미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겁게 다가왔던 적이 있었던가.
삶의 무게는 결국 질문으로 남는다

『정체성』은 끝까지 정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끝에서 더 큰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 같은 질문들은 독자가 자기 자신에게도 묻게 만든다. 쿤데라 특유의 존재론적 사유가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이다.
『정체성』은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읽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는 책이었다.
사랑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오해하고, 때론 그 오해마저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밀란 쿤데라는 이 이야기 안에서 진실을 말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던 질문을, 조용히 꺼내 책장에 숨겨 놓는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시선과 사랑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물음 하나로, 한동안 내 일상도 조금은 조용히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