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최만리 훈민정음 창제 논쟁의 역사와 의의

최만리

차라리 네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라, 아무 걱정 없이 이 세상을 떠나라.
그리하면 나의 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니.

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내 나라의 성벽 안에서조차 치열하게 나태해지기를.
마치 게으른 묘처럼, 단 한 칸만을 위해 눈빛을 빛내라.

너는 내게 있어 궁전의 한 조각, 고독한 그 한 칸이었다.
나는 왕으로서 그 고독 속에서도 여전히 너를 사랑했으니.

나는 단 한 칸의 움직임만이 허락된 존재였다.
이 좁디좁은 세상 속에서, 묻히지 않고 홀로 고독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너의 존재는 언제나처럼 찬란히 빛났다.
손에 든 관을 바라보며, 비어버린 한 칸의 궁을 생각했다.
그곳은 더 이상 채워지지 않을 결핍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창살처럼 얽힌 나뭇가지들 위에, 네가 차지했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하나, 별, 둘.
너를 기억하는 듯이 눈부시게 떠 있었다.
열십자로 교차하는 나뭇가지 위에, 한 칸씩 반짝이며 별이 놓일 때마다,
네가 지고 나타났다.
나뭇가지 두 줄은 언젠가 서로를 만나 하나가 되었지만,
우리는 고독 속에서 서로를 등진 채 선(璇)이 되었다.
그 빈 십자는 내 곁에 남은 마지막 충직한 신하였으며, 동시에
네가 떠난 선택의 흔적이었다.

왕으로서 놓을 줄 아는 자여야 했다.
결국 너의 위에 나를 맡김으로써,
내 욕망의 자리를 확인하며 나는 진정한 무위(無爲)의 왕이 되었다.
왕의 사랑은 결국 행동을 통해 완성된다.
나는 너를 매일 다른 이유로 사랑했다.
나의 신하였기에, 성벽의 일부였기에.

백성을 위함이란 과연 귀하고 빛나는 것일까?
그 빛남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음을, 나는 너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였고,
나는 그 생명에 의해 매일 달라졌다.
너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단단하게 나를 지켜주는 존재, 내가 의지했던 검은 심연.
내가 느꼈던 어두운 밤의 섬세함, 그 섬세함이 곧 너와 나였다.
너는 내가 그 어둠 속에서조차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했던 별이었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나는 궁 안에 갇히고, 우리는 죽는다.
너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사라진 지금,
내 마음은 겨울비처럼 차가운 속엣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깊이 젖어 속까지 짙은 대리석처럼 냉혹한 마음 위에 네 이름을 한글로 적음으로써,
나는 너를 이 궁에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
비가 내리던 날, 쏟아지는 감정으로 네 이름을 파내었을 때,
그 순간은 나의 평생을 관통했다.
찰나의 기억은 영원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너는 영원히 내 안에 머물렀다.

낯선 판 위에서 너는 항상 독특한 방식으로 나를 설득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환기시키고,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모자란 천재처럼 보였고,
핍소한 나는 너의 세계에서 늘 타인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였다.
냉철함과 절제에서 오는 고결함,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과연 왕으로서의 의무일까?
아니면 마음에 끌리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본질일까?
나는 두 나라의 경계에 서 있었다.
네가 없는 이 자리는 한없이 고요했다.

나의 고독은 한(漢)처럼 멈춰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초(楚)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나는 왕으로서 궁에서 살창 밖으로 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세상은 잊혔고, 남은 것은 기억과 그 속에서 길어낸 고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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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이 글은 장기의 규칙을 빌려 세종대왕과 최만리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해본 것이다. 장기판에서 ‘한 칸’만 움직일 수 있는 왕이 느끼는 깊은 고독, 그리고 치열한 논쟁 끝에 서로 등을 돌리며 ‘선(璇)’이 되어버린 두 사람의 모습은, 실제 역사 속에서 세종과 최만리가 마주했던 갈등과 단절을 상징한 것이다. 특히 내가 글에서 사용한 ‘선(璇)’이라는 글자는 ‘아름다운 옥’ 또는 ‘별의 이름’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세종과 최만리가 각자 지녔던 고귀한 이상과 가치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나타내고 싶어서 썼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의 세종대왕과 최만리는 정확히 어떤 관계였고, 어떤 논쟁을 펼쳤을까? 이제부터 훈민정음을 두고 벌어진 이 두 인물의 뜨거운 논쟁과, 그 속에 숨겨진 철학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조금 더 깊고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겠다.


훈민정음(한글)의 창제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문화 사업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문자를 둘러싸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 최만리 사이에는 첨예한 논쟁이 있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고, 이에 반해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유교적 전통과 사대(事大) 질서를 근거로 강하게 반대했다.
두 인물의 입장 차이와 그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은 조선 사회 내부의 사상적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그 역사적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논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어두운 밤, 전통 건물과 자연 속에서 세종대왕이 문서를 들고 앉아 있는 인상적인 블랙톤 일러스트
달빛 아래 펼쳐진 조선의 밤, 세종의 사유가 흐르는 순간

훈민정음 창제와 세종·최만리의 논쟁

세종대왕은 즉위 이후 과학과 기술, 문화 전반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다양한 혁신 정책을 펼쳤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음악, 과학, 농서 편찬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남긴 그는, 1443년(세종 25년)에 백성을 위한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 28자로 구성된 표음 문자 체계로, 당시 한자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일반 백성들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 의도를 밝힌 서문에서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문자 창제를 통해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돕고자 했던 세종의 분명한 의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 보수적인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였다. 그는 일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444년 2월 20일에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동료 학자들과 연명하여 훈민정음 반포를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식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들은 주로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새로운 문자의 창제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 1. 사대모화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
    조선은 건국 이후 줄곧 중국의 예법과 제도를 따르며 외교 질서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사대(事大) 정신과 중화 숭상 가치에 반하는 일로 여겨졌다. 일부 신하들은 이것이 중국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는 것이며, 자칫하면 오랑캐로 간주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상소문에서는 “몽골, 여진, 일본 같은 오랑캐들만 자기 글자를 갖고 있는데, 우리마저 언문을 만든다면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는 전통 질서를 중시하던 조선 조정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지적이었다.

    2. 한자 학습 저해에 대한 우려
    훈민정음이 널리 보급되면 한자 학습이 소홀해지고, 유교 경전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도 있었다. 당시 양반 사회에서 한자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지식인의 교양과 학문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새 문자가 너무 쉽게 익혀진다면, 과거 시험 준비를 포함해 성리학적 공부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최만리는 기존의 차자 표기법인 이두는 한자 기반이라 학습에 도움이 되지만, 언문은 한자와 무관하므로 유익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3. 전례 없는 시도이며 추진 과정이 졸속이라는 비판
    중국 문명권 안에서 지역 언어를 위해 별도의 문자를 만든 전례가 없다는 점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 “바람과 토양이 달라도 방언을 위한 문자는 만들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으로, 훈민정음 창제가 지나치게 이례적인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세종이 극소수 인물에게만 문자를 가르치고, 운서(음운서적)를 편찬하려 했던 방식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상소문에서는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십여 명에게만 언문을 가르쳐 운서를 고치게 하다니 신중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담겨 있었다.

    4. 국본(國本)의 체통에 맞지 않다는 시각
    세자(동궁)가 언문 창제에 관여하는 것 또한 문제로 지적됐다. 세자는 장차 조선을 이끌 왕이 될 인물인데, 전통적인 한학(漢學)이 아닌 새로운 언문에 몰두하는 모습은 왕실의 품격을 해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훈민정음 자체가 낮은 격의 문자로 인식되었기에, 왕실 차원의 적극적인 참여마저도 우려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5. 실용성에 대한 의문
    훈민정음의 실질적 활용 가능성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었다. 표음문자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시, 새 문자는 생소하고 낯선 방식으로 여겨졌다. 일부에서는 “기괴하여 쓸모없고, 익히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결국 훈민정음이 학문이나 행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에서, 일시적인 실험으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6. 국가 기강과 문화 통일성의 훼손 가능성
    마지막으로, 새로운 문자의 도입은 조선의 문운(文運)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당시 조정은 한자를 기반으로 모든 행정과 교육, 외교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훈민정음이 널리 사용될 경우 국가 체계가 이원화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한자와 관리가 둘로 나뉠 수 있다”는 표현처럼, 통치 질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

이처럼 최만리의 상소는 문화적 정체성과 학문 전통은 물론, 실용성과 국정 운영 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훈민정음의 도입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특히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곧 중화 질서를 어지럽히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라는 주장은 당시 유교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중국의 향기로운 향을 버리고 오랑캐의 쇠똥구리 알약을 취한다”는 강한 표현까지 사용하며, 새 문자를 문명의 퇴보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직접 대응에 나선다. 그는 상소문을 읽고 나서 최만리 등에게 “그대들은 옛 성현이 만든 이두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말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위한 것임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세종은 이두의 사례를 들어 새 문자 역시 백성을 위한 실용적 도구라고 설명하며, “내가 이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해 민간에 보급한다면, 어리석은 남녀들조차도 쉽게 깨우쳐 충신·효자·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계몽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 발언이었다.

결국 세종은 최만리 일파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직접 친국(親鞫)을 통해 문책에 나선다. 최만리를 포함한 반대자들은 파직과 함께 하옥되었고, 이후 최만리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세종은 그를 극형에 처하지는 않았으며 결국 용서를 베풀었지만, 최만리는 1445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훈민정음을 둘러싼 공식적인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세종은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설서인 해례본과 함께 새 문자를 반포하게 된다.

세종대왕의 입장과 철학적 배경

한국 전통 궁궐 앞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인상파 화풍으로 표현한 그림
인상파 느낌으로 그려낸 세종대왕, 전통의 풍경 안에서 고요히 빛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배경에는 깊은 애민의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위 이후 세종은 여러 차례에 걸쳐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깨달아 알지 못함을 걱정한다”는 뜻을 밝혔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교육과 생활 편의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예를 들어 《삼강행실도》와 같은 윤리서를 그림책 형태로 편찬해 부녀자나 아이들도 쉽게 도덕을 익힐 수 있도록 했고, 자격루(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와 같은 발명을 통해 시간 개념의 보급에도 힘썼다. 또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서를 한글로 번역·간행한 일도 모두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성과였다.

세종은 문자의 복잡성이 계층 간 지식 격차를 심화시키고, 민생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는 한자 외에 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공식 문자가 없었고, 한국어와 중국어의 구조 차이 때문에 한자로 한국어를 온전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음운학 연구에 몰두하며, 백성이 자신의 말을 직접 글로 옮길 수 있는 문자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드러나는 세종의 통치 철학은 민본사상과 실용주의의 조화로 요약된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국가의 군주였지만, 그는 기존 질서에 경도되지 않고 유연한 해석과 적용을 통해 현실에 맞는 개혁을 시도했다.

한자를 신성시하던 당대 유교 지식인들의 분위기 속에서도 세종은 한자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획이 지나치게 많아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없다”는 점은 그에게 명확한 문제로 보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 체계를 직접 구상하고 제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훈민정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과 음양오행의 원리를 반영한 모음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문자로, 해례본에 설명된 구성 방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언어학적 사고를 함께 담아 한글을 창제했다.

세종은 문화 주권에 대한 의식 또한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비록 사대 외교가 중시되던 시대였지만, 그는 조선의 현실에 맞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훈민정음 창제는 이러한 태도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사례였다.

비록 명나라에 이를 공식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외교적 배려 속에서 창제를 은밀하게 진행한 정황이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조선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이 새 글자가 백성에게 이롭다면, 임금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 모두가 글을 익혀 서로 소통하고, 나라의 도리와 이치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세상이 그려져 있었다.

세종의 이러한 시각은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선구적이었다. 그는 “총명한 이는 하루면 통달하고, 어리석은 이도 열흘이면 배운다”는 말로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접근성을 확신했다. 왕권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을 새롭게 창출하고 제도를 도입했던 그의 리더십은 조선왕조 전반에 걸쳐 성군(聖君)의 전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최만리의 입장과 신념적 배경

최만리(崔萬理)는 세종 시대 집현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철저한 유교 원칙론자로 알려져 있다. 1398년에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한 후 예조와 승정원 등 주요 관직을 거쳐, 세종 대에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었다.

20년 넘게 집현전에 몸담으며 제도 연구와 경서 해석에 힘써온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대쪽 같은 선비’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청백리 관료로도 이름이 높았다.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왕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옳지 않다고 판단한 사안에는 쉽게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러한 성격과 신념은 훈민정음 반대 상소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다. 세종이 불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을 때에도, 그는 유교 이념에 어긋난다며 수차례 불교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고, 국왕이 주관하는 불교 행사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건국 이념의 핵심이었던 성리학 중심 사회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유교적 통치 질서의 근간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최만리의 이러한 보수적인 성리학 가치관은 훈민정음 창제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뉜다.

첫째는 중화(中華) 질서에 대한 깊은 존중이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며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임해 왔다. 최만리는 이러한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신을 지키는 길은 중국의 예법과 문물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한자는 문명의 상징이었다. 한자는 공자의 도와 역대 성현의 지혜가 담긴 성스러운 문자였고, 조선 선비들에게 한문은 곧 자기 수양과 통치 철학의 토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화에서 이탈하는 문화적 도전으로 비쳤다.

실제로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니, 문명에 큰 해가 된다”고 거듭 주장하며 훈민정음 창제를 우려했다. 그의 시각에서 보면, 새 문자는 조선의 문화적 격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외교적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둘째는 성리학적 학문 질서를 지키려는 입장이었다. 조선의 관료 사회와 지식인층에서 ‘학문’은 곧 한문 학습과 유교 경전 연구를 의미했다. 최만리는 젊은 선비들이 한문과 경학(經學)에 몰두해야만 훌륭한 관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한문을 몰라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고안된 문자였기에, 당시 교육 체계와 지식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최만리를 비롯한 반대자들은 “언문이 널리 쓰이면, 한자와 관리가 이원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유교적 교양을 갖추지 않은 이들—즉 성리학 교육을 받지 않은 부녀자나 천민들—도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한글이 보급되면 양반 계층의 지적 우위가 약화될 것이라는 불안도 내포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최만리 본인은 청렴하고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은 성리학 가치와 양반 중심의 질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상소는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다소 경직된 문화관으로 비칠 수 있지만, 당시 사대부 사회의 전반적인 정서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한자와 한문이 오랫동안 공식 문자로 기능했고, 한글은 한동안 여성과 평민의 글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최만리의 시각은 당대 엘리트층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만리의 반대는 개인적인 고집이나 보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대 지식인으로서 지녔던 신념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유교적 질서와 문화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임금의 뜻에 반대하는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성리학 원칙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조선 초기 관료층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다만 세종과의 대립에서 보듯, 과거의 규범에 지나치게 집착한 신념은 결국 시대의 변화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했다.

최만리는 결국 훈민정음 창제를 막지 못했고,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에 가까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는 일개 신하로서 감당할 수 있는 직언의 극한이자 보수 성리학자의 단면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쟁(創政)의 역사적 의의와 후대의 평가

세종대왕과 최만리 사이에 벌어진 훈민정음을 둘러싼 논쟁은 조선 시대 사상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논쟁은 한편으로는 창의적 개혁과 전통적 규범의 충돌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본주의와 문화정통주의의 대립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세종의 뜻대로 훈민정음은 창제되고 반포되었지만, 최만리의 우려처럼 이 문자가 곧바로 사회 전반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반포 이후에도 조선의 공식 문서는 한자로 작성되었고, 양반 계층은 한문을 사용해 학문과 행정을 이어갔다. 훈민정음은 주로 평민과 부녀자들 사이에서 편지나 민간 문학에 활용되는 부차적 문자로 남았고, 이는 한문 중심의 전통이 그만큼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세종의 개혁이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시도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 논쟁은 조선 사회가 지닌 보수성과 진보성 사이의 경계를 드러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은 학문과 정치 권력 간의 역동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세종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제도를 개선하려 했으며, 집현전 신하들은 이를 보좌하는 동시에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성과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신하들이 모두 세종의 뜻에 순응하기만 했다면, 오히려 정책의 논리적 기반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

최만리의 상소는 세종으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더욱 분명하게 정리하도록 자극했으며, 그 결과 세종은 해례본을 통해 새 문자의 원리와 우수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정인지 등 학자들의 해설을 덧붙였다.

또한 훈민정음을 활용한 첫 프로젝트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등의 한글 문헌을 편찬하면서 문자로서의 실용성과 가치를 실제로 입증해 보였다.

결국 반대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훈민정음은 조선 사회의 지적·정치적 긴장을 기반으로 한 역사 발전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후대의 평가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은 워낙 빛났기 때문에, 최만리는 오랜 시간 동안 역사 속 반동적인 인물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한글이 훗날 한민족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세종이 성군 중의 성군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최만리의 반대는 근시안적이고 완고한 태도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러 한글이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강조되던 시기에는, 최만리를 ‘한글을 탄압한 수구 세력’으로 단순화해 비판하는 담론도 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최만리를 무지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인물로만 폄하하기보다, 당대 지배 엘리트가 가졌던 우려를 대변한 인물로서 이해하려는 시각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생전 청렴하고 명망 높은 관료였으며, 사후에는 ‘공손하고 온화하며 어질다’는 의미의 시호 ‘공혜(恭惠)’를 받기도 했다. 이는 조정 내부에서도 그의 인품은 존중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서도, 세종이 그의 상소에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즉시 단행하지 않고 나중에 용서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세종 또한 그를 충정 어린 신하로 인정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최만리의 반대는 결과적으로 패배로 끝났지만, 직언을 감수한 충신으로서의 태도로도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근대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도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일부는 최만리의 반대를 ‘지식인 계층의 기득권 수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자 해독 능력을 독점하던 양반 계층이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한글의 등장을 반대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그의 상소문에는 “아랫사람들이 언문만으로도 세상의 이치를 아는 듯 보이면, 누가 성리학의 깊은 도리를 계속 공부하겠는가”라는 표현이 있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반면 다른 시각에서는, 최만리의 반대가 당대 성리학 질서에서 나온 논리적인 귀결이었다고 본다. 조선 초기에 억불숭유 정책과 사대외교 원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유교적 사고 체계 안에서는,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시도였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만리는 자신의 학자적 신념을 끝까지 지켰으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데는 한계를 가졌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종이 이룬 한글 창제는 인류 문화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혁신으로 기록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인 것만 봐도, 세종과 한글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최만리의 반대는 결과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막지는 못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았지만, 그 논쟁 자체는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서 후대에 많은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세종대왕과 최만리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립이자, 조선 초기 사상적 갈등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흔들림 없는 애민 정신과 학문적 통찰로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고, 최만리는 유교적 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이에 맞섰다.

훈민정음을 둘러싼 이들의 논쟁은 하나의 사회가 새로운 가치를 수용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과 토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세종 시대 조선의 사상적 풍경뿐 아니라, 어떠한 혁신도 반드시 치열한 논쟁과 용기를 동반한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세종과 최만리의 이야기는 ‘위대한 개혁은 논쟁을 거쳐 완성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전하며, 오늘날에도 우리의 문화와 정신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을 깊이 살펴보면서, 역사 속에 숨겨진 갈등과 그 뒤에 감춰진 철학과 신념을 마주하게 된다. 세종대왕은 새로운 문자로 백성을 깨우치고자 했고, 최만리는 전통과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의 논쟁은 단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 사회 속 다양한 갈등과도 겹쳐진다.

역사 속 최만리의 우려는 일견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대 우리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그 모습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새로운 정책이나 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언제나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은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인류의 숙제이기도 하다. 세종은 비록 강력한 왕권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지만, 현대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논쟁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고 발전시켜 나갈지, 갈등을 어떻게 건강한 토론으로 바꿔나갈지가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다.

아래 유튜브 영상 세 편을 통해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오늘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켜 보며, 각자 이 시대의 세종과 최만리가 되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을 해보기를 권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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